황지연 기자
문화부

김태형 연출가와의 인터뷰 일정이 잡혔을 때 동경하는 연출가를 만나러 간다는 설렘으로 벅찼지만 한편으론 걱정스러웠다. 그를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기사화할 것인지에 대한 부담감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정작 그 답을 찾은 건 김태형 연출가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였다. 내가 그와 그의 작품들을 통해 받았던 위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김태형 연출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모순투성이인 삶을 무대 위에 그대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관극하다 보면 그가 강조하는 ‘인간의 양면성’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연극 ‘모범생들’을 본 후, 난 내 비겁함을 비난하며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면서도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었던 자신을 연민했다. 그런데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자기 합리화로 느껴지고, 이어서 그 합리화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땐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궁극에 가서는 삶에 대한 강렬한 회의가 고개를 들고 ‘왜 살아야 하는가’하는 극단적인 생각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김태형 연출가는 사람이 계속해서 살아가는 이유도 작품에 녹여낸다. 그건 때때로 타인이 보기엔 특별하지 않은, 아주 평범한 것일 수 있지만 당사자에겐 더 없이 소중한 순간들이다. 예를 들어 뮤지컬 ‘로기수’에서 ‘기수’는 전쟁 상황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탭댄스를 추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연극 ‘오펀스’의 ‘트릿’에겐 동생 ‘필립’에 대한 책임과 사랑이 삶의 이유였다. 여기에 두 형제를 향한 ‘해롤드’의 격려가 더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삶의 원동력이 된다.

내가 만난 김태형 연출가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그런 그의 작품들과 닮은 사람이었다. 나도 그의 작품과 아주 많이 닮은 사람이어서 자꾸만 그의 이야기 위로 나의 이야기가 겹쳐졌다. 그가 삶의 원동력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자연스럽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떠올랐다. 그가 힘겨운 과정 속에서 쾌감이 공유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있어 계속해서 연출가로서 살아가는 것처럼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대의 에너지가 공연장 안에 가득하게 공유되는 전율을 느끼는 순간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순간이다. 내 기사를 읽고 어느 작가 분으로부터 ‘감사하다’는 연락이 왔을 때, 내가 쓴 기사가 작품의 메시지를 잘 전달한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이런 순간들로 계속해서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이것이 김태형 연출가가 가르쳐준 혐오와 연민 속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엉망인 것 같은 인생에도 평범하게 느껴질지언정 살아갈 이유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는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하나의 공연으로 짧게는 공연의 런닝 타임만큼, 길겐 한 평생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김태형 연출의 작품을 보고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의 굴레에 빠지게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그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나갈 자신만의 순간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