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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가작

기사승인 2017.12.03  0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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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분재(菊花盆栽)
민재원(수리과학부·16)

등산로에서 벗어나자 푹푹 찌는 더위가 찬훈을 감싸 안았다. 태양빛이 그림자마저 태워버린 듯 잠시 더위를 피할만한 그늘은 도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그것도 정오에 내리쬐는 태양이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깔린 바닥에서 아지랑이가 일었다. 아지랑이와 햇빛 때문에 8차선 도로 저 끝이 일렁이어 마치 바다의 수평면을 연상하게끔 만들었다. 멀리서 나란히 달려오는 차량들에 빛이 반사되고 굴절되어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이 더위에 바다라니. 찬훈은 자신의 터무니없는 상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관광버스 한 대가 그의 옆을 지나가서 뜨겁고 매캐한 바람이 면상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관광버스는 찬훈이 걷고 있는 도로 앞에 정차했다. 앞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내렸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네들로 이루어진 등산객들이었다. 저마다 등산 스틱을 들고 삼삼오오 모였다. 버스 안에서는 미처 내리지 못했던 승객들과 함께 유행이 훨씬 지난 대중가요가 흘려 나오고 있었다. 찬훈은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버스 뒷부분을 지나가며 엔진에서 새어나오는 연기를 한 번 더 마셔야만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자주 오르내리는 산에 낯선 이들, 그것도 노인네들 여럿이 침범하는 것이 불쾌했다.
마침 찬훈이 걷고 있는 거리 옆에 영산홍이 잔뜩 피어있었다. 그 광경은 그의 불쾌감을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영산홍이라는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찬훈이었다. 아무 이유가 없었다. 어느 날부터 그는 도로 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 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모조리 뽑아내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개화시기가 한참 지났다면 어떤 꽃이라도 마냥 아름다울 수는 없는 법이다. 잎들이 타들어가는 이 더위에는 더더욱 그러리라. 그러나 짐 때문에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낼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그는 근거 없이 분노를 쏟아낼 만한 대상이 필요했다. 그 대상은 영산홍과 주말에 등산하러 온 노인네들을 향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이성으로 그는 자신이 영산홍을 싫어하는 이유를 노인 혐오에서 찾기 시작했다. 노인네든 영산홍이든 간에 둘 다 도처에 널려있는 것은 마찬가지지. 주위 경관만 헤치고 말이야. 찬훈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봤다. 등산객들이 전부 내린 듯 관광버스가 막 시동을 걸고는 출발할 기미를 보였다. 등산객들은 줄지어 찬훈이 걸어 나온 등산로를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캡 모자를 쓰고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등산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백색, 분홍색, 붉은색으로 알록달록했다. 노인네들의 등산복과 영산홍의 꽃잎이 똑같은 색채를 띠고 있었다. 찬훈의 눈에는 그것이 매우 조잡하고 촌스러워보였다.
다시 한 번 관광버스가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려고 했다. 찬훈은 짐을 내려놓고는 코를 감싸 쥐었다.

* * *

8차선 도로에서 횡단보도를 마주치는 횟수가 잦아졌다. 찬훈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도 하나 둘 늘어났다. 오른편에는 더 이상 산자락이 아니라 건물들이 늘어져있었다. 시가지에 들어선 것이다.
마침내 찬훈은 구청 앞에 도착했다. 4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을 대표하는 곳답게 구청 건물도 으리으리하다. 건물 양 옆에는 야외 주차장과 구민 회관이 있다.
건물 전면 출입구에 내걸린 전광판에서는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다고 적혀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여러 직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몇몇은 1층으로 들어온 찬훈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그가 품 안에 안고 있는 것은 남들 눈에는 썩은 나무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왼손의 비닐봉지에 가득 담겨있는 이끼 덩어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늘은 날이 무척 더웠고 찬훈은 잠깐이라도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이 에어컨 바람의 일부에 그가 낸 세금이 기여하지 않았는가. 물론 올해 들어 기초수급자니 이런 걸로 세금이 감면되긴 했지만 결코 그는 이에 관해 감사하지 않았다. 찬훈은 뒷문을 열고 구청 뒤뜰로 나갔다.
뒤뜰 정원은 굉장히 넓었지만 각각 용도가 있었다. 한쪽은 얼마 전 새로 조성된 생태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편에는 담배연기로 흠뻑 젖은 작은 정자와 벤치와 토끼우리 등이 있었다. 좀 더 안쪽에 들어서면 연못 가장자리에서부터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화분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국 선생의 작업 공간이 있었다.
떡갈나무 아래에서 국 선생은 찬훈이 모르는 남자에게 분재를 가르치고 있었다. 남자의 차림새를 보아하니 점심시간에 잠깐 밖에 나온 구청 직원이었다. 물론 직원들은 분재를 배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한 달에 두 번 정도 잠깐 점심시간에 국 선생의 일명 ‘국화 분재 강의’를 들어주면 연말에 값이 상당한 분재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구청 직원 최 씨도 소문을 듣고 올해부터 국 선생 밑에서 분재를 배우는 중이었다. 물론 이때부터 이미 속마음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지도 모르리라. 찬훈이 도착했을 때 국 선생이 최 씨의 묘목을 골라주는 중이었다.
“우선 색깔이 가장 중요해. 백국은 백조(白鳥), 백봉(白峰)으로, 황국은 미까도, 황호(黃虎)가 괜찮지. 적국도 좋긴 한데. 월후사자(越後獅子). 실내에서 빛을 잘못 받으면 핏빛으로 보여 흉해. 그건 피하는 게 좋아.”
“설국(雪菊)도 괜찮지 않나요? 흰색 꽃이라고 하셨잖아요.”
최 씨가 손가락으로 묘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도 국화 품종을 구분할 줄 안다는 사실에 몹시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꽃이 피지 않은 묘목들의 품종을 잎 모양만 보고 구분해낼 줄 아는 사람은 국 선생 밖에 없었다. 물론 설국은 예외였다. 잎에 뽀송뽀송한 털이 나 있어서 잎에 서리가 살짝 내린 듯했다. 그래서 이름이 설국이었다. 대개 국화 배우는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분해내는 품종이기도 했다.
이를 아는 찬훈은 그들 뒤에서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설국은 줄기가 억세서 분재로는 적당하지 않네. 흰색이 좋다면 백봉이 나을 것이야. 초보자들도 쉽게 다룰 수 있는 꽃이지.”
최 씨가 뭐라 불만을 제기하려고 했지만 국 선생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백봉은 개화시기가 빠른 축에 속하지. 오랫동안 꽃을 볼 수 있을 거야. 다른 꽃들이 시들 때 백봉은 자색으로 변해 가는데 관리만 잘해주면 그것도 보기 좋지.”
보랏빛으로 변하는 흰 꽃이라는 이야기에 혹해서인지 최 씨는 입을 다물었다. 국 선생은 묘목이 담긴 화분을 들고 작업 공간으로 옮겼다. 정원에서 가장 큰 떡갈나무 아래였다. 흙이 덮여 있는 책상 위에는 가위와 철사, 등이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두 달 전에 국 선생이 손수 퇴비와 흙과 모래를 알맞은 비율로 섞어놓은 흙더미가 있었다. 그리고 각종 나무 조각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주먹만 한 것부터 어린 아이의 키에 육박하는 것까지 크기가 다양했다. 찬훈도 뒷산에서 가져온 나무 조각을 그 옆에 내려놓았다.
“자네가 만들 작품은 목부작(木附作)이라고 하네. 말 그대로 묘목을 고목에 붙여서 만들어.”
묘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국 선생은 바구니 뒤에서 나무 조각 하나를 꺼내왔다. 이름 모를 죽은 나무의 가지였다. 나무 조각은 아래팔 정도의 길이였고 한 쪽이 뭉뚝했다. 그 부분을 가리키며 국 선생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부분에 묘목을 올릴 거야. 며칠 지나면 묘목의 뿌리가 두꺼워지면서 목재에 고정되지. 오직 국화로만 이러한 목부작을 만들 수 있어.”
“그럼 국화가 나무에 기생하면서 살게 되는 건가요?”
국 선생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국 선생은 말없이 나무 조각을 화분에 철사로 고정시키고는 화분에 자갈과 흙을 차례로 깔았다. 최 씨는 민망하면서도 언짢은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묘목을 들고는 국 선생이 다시 설명을 계속했다.
“뿌리키움묘라고 한다네. 이렇게 좁은 관을 화분에 박아 넣고 그 위에서 묘목을 키우는 거야. 그러면 묘목이 수분을 찾아 기다란 관을 따라 뿌리를 내리지.”
국 선생이 말한 대로 화분에는 관이 꽂혀 있었다. 단지 그것은 일반적인 관이 아니었다. 물과 햇빛으로 포장지가 바랬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배드민턴 셔틀콕 케이스였다. 원통이면서 알맞은 크기인데다 종이 재질이라 가위로 오려내기도 편해서 국 선생이 오래 전부터 애용해왔다. 구민 회관의 배드민턴장에서 수시로 가져오곤 했다.
국 선생이 가위로 관을 벗겨내고 흙을 털어내자 묘목의 뿌리가 드러났다. 과연 묘목의 뿌리는 일반적인 묘목의 그것보다 길이가 두 배 가량 길었다. 나무 조각 위에 올려놓아도 뿌리가 흙까지 충분히 닿았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잔뿌리는 떨어져나가고 몇몇 놈들만이 굵어지게 돼. 목재를 꽉 물게 되어 철사 없이도 묘목이 목재에서 쉽사리 떼어지지 않아.”
국 선생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찬훈에게 말을 걸었다.
“이끼 더 가져왔나?”
“여기 있습니다.”
묘목의 뿌리가 그대로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기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얼마 간 이끼로 뿌리를 덮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제 완성이군.”
그러나 여전히 국 선생은 최 씨가 아니라 찬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네가 이거 좀 연못에 담구고 와.”
찬훈은 막 완성한 목부작을 연못으로 들고 갔다. 그리고는 화분 채로 물에 잠수시켰다. 연못은 얕았지만 그렇다고 화분을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깊이는 아니었다. 화분의 흙에서 공기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공기방울이 뜸해질 무렵 찬훈은 화분을 들어올렸다.
찬훈이 화분을 도로 가져오자 최 씨가 자신의 이름표를 화분에 꽂았다. 국 선생은 잠시 그늘 아래에서 쉬며 하늘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올해는 지빠귀가 까치를 몰아냈구먼.”
이번에도 찬훈은 슬며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 초봄부터 맨날 들어오던 대사였다. 연못이 있어서 매년 새들은 구청 뒤뜰에 둥지를 틀었다.
“뭐, 구청장님도 바뀌었는데 그럴 만도 하죠.”
최 씨도 역시 올해 초부터 내내 하던 대사를 내뱉었다. 야릇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반면 찬훈의 눈에 비친 국 선생의 표정은 어두워져 가는 것이었다.

* * *

화분에 심어져 있는 모종은 모두 국화였다. 국 선생이라는 이름의 유래이기도 했다. 4년간 국 선생 옆에서 국화 일을 거들었지만 아직도 찬훈은 그의 실명을 알지 못했다. 단지 아주 오래 전부터 구청 직원을 통해 국 선생이 일종의 정원사를 떠맡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마침 그때 구청장 역시 국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매년 국화 축제를 담당하는 조건으로 국 선생에게 국화 분재를 위한 예산을 할당하게 했다는 점 정도였다. ‘OO구 주민을 위한 국화분재 프로그램’이라는 명목 아래에서였다. 처음에는 수십 송이에 불과하던 것이 해마다 국 선생이 품종을 늘려 지금은 수천 송이에 이르렀다.
그러나 올해부터 구청에서 윗사람이 교체되면서 뒤뜰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최 씨를 비롯한 일부 직원들만이 변화의 도달점을 예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찬훈에게는 작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국화는 매년 피고 졌다. 단지 국 선생의 말에 의하면 올해는 몹시 가물고 덥다는 차이 정도였다.
하지만 찬훈도 최 씨의 등장에 어느 날부터 압박감을 받기 시작했다. 최 씨가 자신이 올해부터 구청 뒤뜰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며 국 선생에게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 연못이 성공한 드문 케이스라고 하더군요.”
여전히 물러가지 않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국 선생과 찬훈은 국화를 그늘 아래로 옮기고 있었다. 최 씨는 잠시 담배를 피러 왔다면서 자꾸만 국 선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보통 인공적으로 연못을 조성하면 수질이 금세 망가지기 십상이라면서요. 그런데 이곳은 벌써 몇 년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멀쩡하잖아요. 밑에 열선도 깔아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대요. 아무튼, 우리 부서에서도 지금 이거에 초점을 맞춰서 투자를 해볼까하는데 말이죠.”
국 선생은 잠시 옮기던 화분을 내려놓고는 숨을 돌렸다. 아직 늦여름이라 두세 개는 한꺼번에 들 수 있을 정도로 화분이 작았다. 날이 무더워서 물이 바짝 말라 가볍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서 수백 개에 이르는 화분을 일일이 나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국 선생의 주의를 끌지 못하자 최 씨가 화재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지난주에 부서장이 전달하라고 했었는데요. 국화 분재 이거 누구누구가 하고 있는지 리스트 작성해오라고 하더군요.”
“그게 왜 필요하지?”
“이것도 나름 예산 꽤나 받고 있잖아요. 무슨 프로그램이라는 이름 하에서요. 등록도 제대로 안 된 채로 운영이 되어서는 안 되죠.”
국 선생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묵묵히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윽고 입을 열었지만 이전과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날이 가물어서 말이지. 왜 이리 벌레가 많은지 몰라. 특히 올해는 이놈의 선녀벌레가 말썽이야. 올해는 농약을 치든가 해야지.”
선녀벌레는 멀리서보면 하얀 먼지처럼 보였다. 그러나 손으로 건들면 툭 튀어 올라 잡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어찌나 많은지 국화 줄기마다 허옇게 덮여있었다. 물로 씻겨주기만 해도 나을 테지만 물방울이 고이면 잎이 누렇게 타들어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국 선생이 대답을 하지 않자 최 씨는 찬훈을 붙잡고는 명령조로 묻는 것이었다.
“자네도 보아하니 이쪽 직원은 아닌 것 같은데. 이름이랑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지?”
찬훈은 당황한 듯 멍하니 아래만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구민이어야지 등록할 수 있어서 그래. 조회하려면 필요하니까 물어보는 거야.”
찬훈도 이곳의 구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 * *

국화 분재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 언제보다도 더 찬훈의 관심을 보였다. 그렇다고 이목을 끌기 위해 일부러 찬훈이 분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면접을 보다 보면 면접 시험관이 취미가 무엇이냐고 종종 물어볼 때가 있었다. 그러면 찬훈은 아무 생각 없이 국화 분재라고 대답했다. 도시 내에서 국화를, 그것도 분재까지 한다는 건 매우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말없이 가만히 있는 성격과 더불어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면접이 끝났을 때 정작 시험관들이 찬훈에 관해 기억하는 것은 스펙보다 국화 분재였으리라.
그렇지만 조금만 세부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단순한 호기심에 그쳤다. 찬훈도 자세한 얘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취미를 타인에게 납득시키려고 부단히 노력을 기울이지만 찬훈은 전혀 아니었다. 타인을 만날 기회가 현저히 낮아서 일까. 국화 분재가 취미보다 일상에 더 가깝기 때문일까.
그러나 국화에 관한 사람들의 질문이 반복되자 어느 날부터 찬훈도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었다. 왜 자신은 국화 분재를 하는가. 그것은 굉장히 생각하기 어려웠다. 찬훈의 마음속에서 국화 분재와 자신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구청 뒤뜰에 도착하기만 하면 찬훈이라는 존재는 수백 송이의 국화 밑에 묻혀버렸다. 그래서 아무런 잡념 없이 오롯이 국화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국화 분재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최근 찬훈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기 자신을 지워내기 위하여.

* * *

하지만 결국 최 씨는 찬훈의 신원 정보를 어떻게든 알아낸 모양이었다. 국 선생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찬훈을 붙잡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와 그토록 그가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까발리는 것이었다. 6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는 뒤뜰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자네, 전과가 있더군.”
최 씨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시작했다.
“멀쩡히 대학 잘 나온 청년인데 말이야.”
찬훈은 멍하니 밑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막상 사실이 드러나자 더 이상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외려 적개심만이 저 아래서부터 6층 사무실까지 마음속으로 기어 올라올 뿐이었다. 이를 전혀 알 리가 없는 최 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요즈음 경기가 안 좋아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니, 젊었을 때는 욱할 수도 있다니 이런 얘기를 하면서 찬훈을 두둔하는 것이었다.
“나도 자네처럼 행시 준비를 해봐서 알아. 정말 괴롭고 힘들어. 그 쬐그만 고시방 안에 맨날 갇혀서 말이야. 근데 어쩌겠나. 자네도 국화 분재해서 알지 않나. 철사로 줄기를 이리저리 비틀어놓고는 말을 제대로 안 들으면 가차 없이 잘라 버리잖아. 근데 그걸 예술이라고 하지. 현실도 마찬가지야.”
최 씨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시계를 보았다. 4시 10분 전이었다. 곧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아무튼 이런 쓸데없는 얘기는 치우고. 자네한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이지. 자네는 국 선생하고 친하니까 설득을 할 수 있을게야.”
최 씨는 긴말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지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국화분재에 예산을 투자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확정된 걸로 보면 된다네. 단지 작업도구가 염려 되서 말이지. 국화 축제가 끝나고 나면 국 선생이 우리 관리 하에 모두 넘겼으면 한다네. 사실 그 화분이니 흙이니 모두 우리 구청 예산으로 사놓은 것들 아닌가.”
서류를 챙기고는 최 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네가 내 말을 오해 없이 잘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어. 우리 모두 다 잘 되라고 하는 말이라네.”

* * *

가지 끝에 꽃심이 만져질 무렵, 최 씨가 다시 뒤뜰에 나타났다. 몇 명의 인부들과 함께였다. 그들은 연못 주위를 맴돌며 무언가를 논의하는 듯했다. 줄자로 이리저리 간격을 재고는 막대로 자리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최 씨는 한참동안 인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더니 국 선생과 찬훈을 향해 걸어왔다.
“나무 심으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선생의 고견이 필요한 것 같아서 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게 의견을 구하는 것보다는 자랑하려는 것에 가까웠다. 최 씨는 직원들의 휴식 공간을 위해 새로 식물을 심기로 했다고 말했다. 연못 주변에 나무를 세우는 것도 그 일부였다. 나무의 품종은 찬훈에게 낯설었다.
“저번에 선생께서 소나무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해주신 게 기억나서요. 솔잎이 알칼리성이라 그 밑에서는 아무 식물도 살지 못한다니 그런 얘기를 해주셨지요. 어떠신가요? 저렇게 심는 것도 괜찮을려나요?”
찬훈은 국 선생의 혹평을 기다렸다. 국 선생은 평소에도 뒤뜰에 심어있는 나무들을 가리키며 잘못된 자리에 심었다며 혀를 차고는 했다. 음지에 적당하지 않다, 토양이 좋지 않다며 그래왔다. 심지어 작업공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떡갈나무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그늘 때문에 그 밑에서 다른 식물들이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국 선생은 이번만은 잠잠히 최 씨의 자랑을 말없이 들어주기만 하는 것이었다.
“괜찮네, 그려.”
최 씨는 갑작스러운 칭찬에 당황한 듯 우물거리다 인부들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멀어지자 찬훈이 물었다.
“정말 괜찮은가요?”
그러나 국 선생은 묵묵히 하던 일에만 계속하는 것이었다. 국 선생이 만들고 있는 것은 연근작(連根作)이었다. 언뜻 보면 서로 다른 묘목이 차례로 심겨져 있는 듯했지만 땅 속에서 모두 이어져 있었다.
국 선생은 가지들을 둥그렇게 배치하고는 그 뒤에 주먹만 한 돌들로 꾸몄다. 그리고는 이끼로 흙을 덮었다. 마치 산과 숲을 바라보는 듯했다.
“가운데에 펄라이트로 덮어주면 좋지 않을까요? 호수처럼 보여서 좋을 것 같은데요.”
그제야 국 선생은 하던 일을 멈추고는 찬훈을 바라보았다.
“펄라이트도 좋긴 하지. 하지만 물이 닿으면 약염기가 되어 식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그리고 꽃이 흰색이라 어울리지도 않고.”
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못으로 가져가서 물에 한 번 담그고 와.”
돌로 만든 화분이라 무게감이 꽤 있었다. 찬훈은 두 손으로 밑을 조심히 받쳐 화분을 들었다. 그러나 이내 국 선생이 찬훈을 다시 불렀다.
“아냐. 이제부터는 연못에 담그지 말게나. 그냥 호스로 물 길러서 뿌리개로 주도록 해.”
이 또한 찬훈의 마음속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물뿌리개는 물줄기가 굵어 자갈이나 이끼가 쓸려 내려가기가 쉬웠다. 또한 물을 흠뻑 주기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국 선생은 몇 년간 하던 방식을 갑자기 버릴 것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 * *

그리고 마침내 국화가 막 피어나는 시기가 되자 모든 것이 확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해 국화 농사는 풍년이었다. 수백에 이르는 국화들이 저마다 가지 끝에 알록달록한 빛깔을 보였다. 벌써부터 반쯤 피어난 묘목도 있었다. 국화 작업도 거의 끝나갔다. 꽃 정리만 조금씩 해주면 되었다. 꽃봉오리를 따서 지그시 누르면 국향이 아련했다. 평소에 관심이 없던 직원들도 그 광경에 홀린 듯 멈춰서 한참동안 쳐다보곤 했다. 바야흐로 국 선생이 언젠가 말한 ‘가장 국화가 아름다운 시기’였다.
뒤뜰의 풍경은 국화의 개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다른 꽃들은 국화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자취를 감추었다. 나무들마다 단풍이 들어 보는 이들을 기대감에 설레게 하였다. 가끔씩 낙엽이 국화 위에 떨어져 찬훈은 부지런히 이를 걷어내야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조금씩 날렸다. 최 씨와 인부들이 심어놓은 나무들도 조금씩 낙엽이 졌다. 낙엽은 아래로, 아래를 향해 연못에 살며시 떨어졌다. 낙엽들이 연못 위를 노랗게 덮었다.
그리고 연못물이 썩기 시작했다.

* * *

물론 찬훈은 무엇이 연못물을 썩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매주 국 선생 옆에서 분재를 하며 식물에 관한 여러 지식을 쌓았지만 그것은 좀 다른 종류의 지식이었다. 마치 20년간 아이를 키웠지만 아래 세대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찬훈의 어머니와 같았다. 찬훈도 그랬다. 길거리를 걸으며 마주치는 저 꽃들이 어떤 고유한 성질을 갖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조화인지 생화인지는 알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이를 구분해낼 수 있는 까닭은 잎이 하나라도 뒤집혀 있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식물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이성적으로 생각해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본능적으로 연못이 죽은 이유가 국 선생에게 있음을 느꼈다. 적어도 죽도록 방치한 것은 맞을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혼란을 느끼며 그는 그날 사무실에서 최 씨가 자신에게 한 말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최 씨는 국 선생의 과거사까지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였다고 했다. 그는 마치 국 선생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교직에서 쫓겨난 것처럼 말했다.
“또 국화잎으로 저놈들에게 먹이를 주는가?”
찬훈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국 선생이었다.
“저놈들에게 국화를 먹이면 그것에 맛 들린단 말이야. 자칫하면 국화 농사 망칠 수 있어.”
국 선생이 ‘저놈들’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토끼였다. 뒤뜰 구석의 토끼우리에 다섯 마리가 갇혀있었다. 구청 직원들과 찬훈과는 달리 국 선생은 이 토끼들을 몹시 싫어했다.
“국화 일 하기 전에도 선생님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찬훈은 머릿속에 든 생각을 입 밖으로 내밀었다. 토끼를 노려보던 국 선생이 찬훈을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찬훈은 문득 국 선생을 마주한 것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두 번째였다. 맨 처음에 만났을 때. 햇빛으로 검게 탄 국 선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찬훈은 그의 과거사가 불현 듯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자네와 나는 항상 국화 일에 관해서만 얘기해왔지. 맨 처음 만난 일을 제외하곤 말이야. 그날 나는 자네를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었지. 자네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니, 그러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댔는데도 말이야. 국화도 장례식에서 말고는 본 적이 없다고 했지.”
다음에 국 선생이 한 말은 전혀 찬훈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자네가 전과자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네. 그 사람이 말해주었지.”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작업장으로 향했다.
“아무튼 토끼 놈들한테는 절대 국화를 먹이지 말게. 저놈들이 저번처럼 땅굴파고 나가면 제일 먼저 국화 꽃순부터 손 댈 테니.”
찬훈은 국 선생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 * *

찬훈은 구청 건물 밖을 걸어 나왔다. 그러자 국화 바깥의 세상이 그의 감각을 일깨웠다. 태양은 저물어 버린 지 오래고, 가로등과 헤드라이트와 네온사인의 빛이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북적이던 사람들은 없고, 숨결만이 응결되어 거리를 뿌옇게 감쌌다. 빛과 어둠과 그림자로 거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잠시 도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차도에는 차들로 붐비었다. 꽉 찬 8차선 도로에서 차례대로, 규칙적으로 지나갔다. 조그만 오토바이도, 십 톤짜리 대형 트럭도 똑같은 방향으로 줄줄이 지나갔다.
가끔 생각해보면 이는 신기한 광경이기도 했다. 언제라도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계들이 맨날 버젓이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은 ‘교통법’이라는 것을 나름 준수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몇 년 전 공부했던 법률책에 의하면 그랬다. 그러나 지금 찬훈 눈에는 도로에서의 규칙은 그것이 아니었다. 번쩍이는 스포츠카는 속도를 내고, 택시가 깜빡이면서 슬쩍 끼어든다. 버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빨간불을 무시한다. 낡은 중고차는 그 기세에 눌려 쭈뼛거리며 서 있다. 찬훈 생각에는 이것이야말로 도로를 지배하는 법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찬훈의 머릿속을 지배해왔다. 적어도 국화분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꾸만 오랫동안 잊으려고 했던 생각들이 찬훈의 머릿속에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가 국 선생을 만난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평소처럼 산을 오르다 그날따라 구청까지 발걸음이 닿았다. 그때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던 것 같다. 목에 명찰을 달고 커피를 든 채 사무실로 향하는 직원들이 찬훈은 너무나도 부러웠다. 그가 꿈꾸어 왔던 자신의 미래 모습이었다. 그날 그는 몰래 구청 내 식당에 들어와 직원들 사이에서 점심을 먹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기회를 영영 잃었다. 아니, 그게 실수였나. 무엇을 실수했단 말인가. 더 이상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하긴, 스프링클러. 그거 하나는 실수였다. 마침내 찬훈의 왼편에 건물들이 사라지고 산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른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은 채 달리고 있었다. 그때 저지른 일에 관해서는 후회가 없다. 더 이상 그는 그 좁은 방 안에서 책들에 둘러싸인 채 기약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불을 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맨 처음 불사른 것은 평소에 그렇게나 혐오했던 대상들과 거리가 멀었다. 제일 먼저 자신의 책들을 태웠다.
뚝, 소리와 함께 찬훈의 마음속에서 공들여 가꾸어온 국화의 가지가 끊어졌다. 철사로 줄기를 이리저리 비틀어놓고는 말이야. 문득 최 씨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지금의 감정은 최 씨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말고 문득 그는 멈춰 섰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 *

구청 곳곳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뒤뜰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경비원이 매 시간에 순찰을 돌기까지 했다. 하지만 눈에 띠지 않고 들어가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야외 주차장 가장자리에 작은 틈이 있다. 그곳으로 들어서면 될 것이다.
찬훈은 가슴이 방방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수년간 참아왔던 모든 것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기민하고 생각은 침착했다. 아무도 모르게 뒤뜰까지 들어왔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국화가 있는 곳 가까이에 경비실이 있었다. 물론 뒤뜰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개화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빛 조절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국 선생이 가로등을 모두 양동이로 씌워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국화 쪽으로 다가서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찬훈은 국화 옆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그가 향한 곳은 덤불 사이에 있는 토끼우리였다. 토끼우리는 흙 위에 철장이 둘러져 있고 그 위에 덮개로 천장이 가려져 있었다. 토끼들은 그의 움직임에 잠을 깬 듯 비좁은 우리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는 토끼우리 옆에서 손가락으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땅에 물기가 없어서 파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얼마 후 그의 손가락이 토끼의 몸과 닿았다. 마침내 굴이 뚫렸다. 토끼들은 처음에는 난데없이 들어온 불청객에 놀라 달아나려고 했지만 이내 굴 속으로 머리를 넣었다. 하나 둘씩 찬훈이 파낸 굴을 통해 밖으로 기어 나왔다.
강렬한 흥분이 찬훈의 온몸을 들뜨게 만들었다. 다섯 마리의 토끼들이 뒤뜰에 사방팔방 날뛰기 시작했다. 국화잎이라면 혼자서 수백 장이라도 먹어치우는 놈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초식동물들이 그러듯 토끼 역시 줄기의 맨 끝부분을 가장 좋아했다. 가장 여리고, 가장 영양이 풍부한 부분이었다. 바로 꽃봉오리였다. 국 선생이 언젠가 말하길 한 마리의 토끼는 수백 송이의 꽃봉오리도 능히 따먹는다고 했다.
게다가 늦가을에 접어드는 가을이라 뒤뜰에서 토끼들이 먹을 수 있는 먹이는 국화뿐이었다. 찬훈은 숨죽여 국화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국화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줘도 안 먹는 잡식물을 뜯어먹고 있었다.
찬훈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이번에도 실패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날, 행정 고시 준비를 관두고 고시원에서 뛰쳐나왔다가 다시 돌아온 그날. 불을 질러 버린 그날. 고시원은 매우 낡은 건물이었다. 활활 타버릴 줄 알았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그 건물은 고시원을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 아니었다. 스프링클러가 있었다. 건물이 고시원으로 바뀌면서 모두가 잊어버렸지만 어쨌든 그것은 그날 모두를 살렸다. 맹렬히 타오르던 불길도 단 몇 분 안에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발각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찬훈은 묘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둠 때문에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분명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잔뜩 차가워진 그의 손가락이 국화잎에 묻어있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농약이었다.
홧김에 그는 화분을 통째로 연못으로 집어던졌다. 썩은 물속으로 국화가 통째로 내리꽂혔다.

* * *

국화 축제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국 선생에게 상황은 유리하지 않았다. 연못에 던져진 국화를 트집 잡아 일부 직원들이 국 선생을 모함했다. 국 선생이 일부러 연못물에 농약을 탔다고 했다. 실제로 연못에서는 미세하게 농약 성분이 검출되었다.
국 선생은 자신에 대한 어떤 변호도 하지 않았다. 필요한 작업 도구를 챙긴 채 구청에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수백 송이의 꽃들이 그대로 뒤뜰에 남은 채 겨울을 났다. 최 씨 이름표가 적힌 꽃이 보랏빛으로 물들 때에도 최 씨는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

* * *

찬훈이 도착한 곳은 어느 지역의 작은 학교였다. 그는 학교 담장 밖에서 서서 학생들이 모두 하교할 때까지 기다렸다. 편의점에서 빵 하나로 끼니를 때워서 배가 고팠다. 그러나 마음이 텅 빈 것 같아 좋았다.
오늘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이 학교는 디귿 자 모양의 건물이었다. 디귿 자 안에 학생들을 위한 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 선생이 일을 하고 있었다. 찬훈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국 선생은 고개를 들어 찬훈을 한 번 보더니 이내 작업을 계속했다. 찬훈이 모르는 꽃을 매만지고 있었다. 문득 국 선생이 다시 고개를 들어 찬훈을 마주했다.
“자네가 그랬는가?”
그러나 찬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꽤나 오랫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고 선 채 침묵을 유지했다. 이윽고 찬훈이 말을 이었다.
“방금 둘러보니까 선생님께서 더 이상 국화를 안 키우시는 모양이더군요.”
국 선생은 고개를 숙이고는 작업을 계속했다.
“응. 건물에 둘러싸여 음지라서 국화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북향이라 빛이 안 들어와.”
국 선생은 찬훈을 데리고는 정원 여기저기를 구경시켰다. 찬훈이 처음 들어보는 품종도 더러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찬훈은 문득 구석에 놓인 삽목용도 판을 보았다. 그것은 국 선생이 구청에서 일할 때도 쓰던 것이었다. 여러 새싹들이 물을 머금은 채 판 곳곳에 꽂혀 있었다. 며칠 후에는 좀 더 큰 화분에 옮겨 심어야할 것이다.
새싹들의 잎 모양이 찬훈의 눈에 굉장히 익숙했다.
“영산홍이야. 길거리에서 몇 개 따왔어. 한 번 키워보려고.”
문득 국 선생의 머리에서 흰 머리 몇 가닥이 찬훈의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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