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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대학문학상 희곡·시나리오 부문 가작

기사승인 2017.12.03  05: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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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시간

조현규(에너지자원공학과·12)

S#1. 서울대 법학도서관 카페 ‘이야기’ (INT/D)

암전 상태.

커피 로스팅 기계가 몇 초간 요란하게 돌아가다 소리가 멎는다.

카페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알바(V.O)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병호(V.O) 네 감사합니다.

병호 발걸음을 옮겨 카페 입구로 향한다.

S#2. 서울대 캠퍼스 거리 (EXT/D)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화면이 밝아진다. 따가운 햇살이 병호의 얼굴에 닿는다. 눈을 한 번 찡그리는 병호.

병호,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간다.

병호(N) 드디어 마지막 학기가 끝났다. 복학하고 지금까지 쉴 틈 없이 달려왔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계단을 올라가는 병호의 맞은편에 한 커플이 내려오고 있다.

병호 그들을 힐끗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린다.

그러곤 가장자리에 좀 더 붙어 계단을 마저 오른다.

CUT TO

83동 앞을 지나는 병호가 먼발치에서 보인다. 생각에 잠겨있는 병호.

병호(N) 연애? 연애한 지도 오래됐다. 4년 전 겨울에 헤어졌으니.

그 후에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랜 짝사랑은 나와 맞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가는 친구가 있으면 곧장 용기 내어 들이댔다. 하지만 전부 까였다.

병호, 경영대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서서 운동장을 바라본다.

축구를 하는 무리로부터 기운이 넘치는 기합소리가 들려온다.

병호(N) 시간이 나를 비웃듯이 흘렀고 이젠 반쯤 포기했다. 미국 현지 회사에 취직을 했고 그곳에서 제2의 인생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떠나기까지 딱 70일 남았다.

병호, 빨대를 한 번 빨아보지만 공기 소리만 난다. 얼음만 몇 개 남은 일회용 커피 컵을 바라보는 병호. 그러다 멍하니 관악산을 한 번 쳐다본다. 이어 시선을 조금 더 위로 향하는 병호.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조금씩 드러난다.

하늘에 천천히 쓰이는 타이틀,

사랑할 시간

S#3. 하윤의 자취방 (INT/D)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인적이 드문 건대입구역 원룸촌의 거리. 깨끗이 정돈이 되어있는 하윤의 방.

하윤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옷차림이다.

의자에 앉은 채 노트북을 집중해서 바라보며 파워포인트 템플릿을 만들고 있다.

곧 완성이 되자 기지개를 한 번 켠다.

하윤, 파워포인트 창을 끄고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시청한다.

CUT TO

햇볕이 들어오고 있는 자취방의 창문.

하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대박이를 보며 이가 다 보이도록 웃는 하윤.

잠시 후,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하윤 노트북을 정리하고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자취방을 나선다.

S#4. 건국대 캠퍼스 거리 (EXT/D)

한 건물 앞, 네 명의 남녀가 모여 있다.

팀장은 더위에도 씩씩하고 그 옆에 하윤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팀원 1, 팀원 2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팀장 우리 지인만으로는 설문조사 인원이 부족해서 학교 돌아다니면서 머릿수를 채워야 할 것 같아. 덥지만 다들 좀만 고생해줬으면 좋겠어.

다른 팀원들 네!

팀장 아 그전에 음료수라도 마시고 시작하자.

팀장이 비닐봉지 속에서 음료수를 꺼내자 다른 팀원들은 오 오하면서 반긴다.

팀원1(여) 근데 진짜 덥지 않아요? 그냥 통계 좀 조작하면 안 되나?

팀원2(남) 그러게. 카페 가서 빙수나 먹고 싶다.

하윤 저는 이렇게 밖에 나와서 설문조사하는 거 되게 좋아요. 학교 다닐 때 아니면 이런 거 언제 해보겠어요?

팀장 하윤이 역시 긍정적이야. 여기 두 뺀질이들만 있었으면 발표 준비 힘들었을 텐데. 매번 약속시간 늦기나 하고.

팀원2(남) 뺀질이라뇨? 저 완전 열심히 하는데요? (팀원들을 둘러보며) 사실상 내가 우리 팀 에이스 아니야?

팀원1(여) 응, 오빠 에이스 아니야. (팀장을 보며) 근데 뺀질이라니 진짜 억울하네.

하윤 속상해하지 마세요. 두 분 다 우리 팀에 꼭 필요하신 분들이에요. 전 이렇게 네 명 같이 하는 게 정말 좋아요.

팀장 (하윤을 흐뭇하게 바라본 후 팀원 1, 2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알았어. 뺀질이라는 말은 취소할게. (시계를 한 번 본 후) 그나저나 잡설 그만하고 이제 시작하자.

S#5. 건국대 캠퍼스 호숫가 (EXT/D)

하윤, 한 남성과 설문조사를 마치고 인사하며 뒤돌아 간다.

더위에 지친 티가 나지만 여전히 밝은 표정의 하윤.

하윤 벌써 9명 채웠네. 1명마저 채우고 집에 빨리 가야지.

호숫가를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호수를 바라보는 병호.

하윤, 병호를 발견하고 다가간다.

하윤 저기..

병호 (고개를 돌리며) 네?

하윤 아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병호 아녜요. 괜찮아요. 근데 무슨 일로...?

하윤 제가 동아리 발표 준비 차 설문조사를 하는 중인데요..

병호 아.. 네! 근데 제가 이 학교 학생이 아닌데...

하윤 다른 학교 다니세요?

병호 네. 건대는 잠깐 놀러 온 거예요.

하윤 잠깐 고민한다.

하윤 그래도 대학생이시면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설문이 꼭 저희 학교 학생만이 답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아마 저희 또래가 다 흥미를 가질 만한 내용일 거예요.

병호 음.. 알겠어요. 그런데 저기 벤치에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많이 더워 보이세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하윤 네 좋아요!

S#6. 건국대 호숫가 벤치. (EXT/D)

벤치엔 그늘이 두 사람 모두가 들어오기엔 조금 부족하게 져있다.

병호, 그늘과 햇빛의 경계에 먼저 앉는다. 덕분에 그늘이 넉넉하게 진 곳에 앉는 하윤.

하윤 일단 설문조사 응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병호 아니에요. 저도 시간이 비던 찰나라서.

하윤 그럼 질문드려도 될까요?

병호 네.

하윤 혹시 그런 생각해보셨어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이라는

병호 지구가 멸망한다면요? 어릴 때 말곤 생각해본 적 없었던 것 같아요. (잠시 뜸을 들이다 슬쩍 웃으며)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답해야 하나.

하윤 (살짝 웃으며) 제 질문은 그냥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좀 더 구체적이에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연인과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요.

병호 연인이요? 저는 지금 여자 친구가 없어서...

하윤 (미소를 띤 채) 여자 친구가 없어도 대답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꼭 연인이 있어야만 답할 수 있다 이런 건 아니라서. 한 번 상상으로라도 대답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병호 (잠깐 동안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뜬다.) 음... 마지막 날이면 이제 모든 게 마지막인 때잖아요?

하윤 그죠.

병호 그러면 사실 같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정말 소중하게 다가올 것 같아요. 굳이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1분 1초가 감사한?

하윤 그러겠죠? 그래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다 말씀해주신다면?

병호 아 그런데 집에는 가야겠죠? 마지막을 여자 친구와 함께 한다면 저는 영원한 불효자식으로 남는 거니까.

하윤 (잠시 당황하다 미소를 띤다.) 맞아요. 저도 집에 갈 거예요.

병호 저 이상한 사람 아니죠?

하윤 네!

병호, 고개를 들어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어간다.

병호 음... 집에 가기 전엔 여자 친구를 한 번 꼭 안아 보고 싶어요. 그리고 말하고 싶어요. 고맙다고. 나 같이 부족한 사람 많이 사랑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담백하니 멋진 이별인 것 같아요. 그런데 꼭 자기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말해야 하는 걸까요?

병호 (멋쩍게 웃으며) 저는 제 스스로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느껴서요. 별로 매력도 없고. 그래서인지 지금껏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하윤 자신감을 가지세요! 저는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알아봐 주는 사람이 꼭 나타날 거예요.

병호 (씁쓸하게 웃는다.)

하윤 정말인데?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보세요. 상대방이 다가와주기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가서 매력을 어필해 보는 거죠. 그러다 보면 인연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병호 그럴...까요.

하윤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요! 그럼 다음 질문드려도 될까요?

병호와 하윤, 이야기를 계속 나눈다.

CUT TO

벤치 옆에 있는 나무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따라 천천히 흔들린다.

하윤 이제 다 끝났어요. 좋은 답변 들려주셔서 고마워요.

병호 아니에요. 덕분에 힐링한 느낌도 들어요.

하윤 그러셨다면 다행이네요. 그럼 살펴가세요!

병호 네. 안녕히 가세요.

병호와 하윤,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에게 인사를 한다.

하윤 뒤돌아서서 걷는다.

병호, 하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벤치에 앉는다.

잠시 고민하다 결심이 선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병호.

S#7. 건국대 캠퍼스 거리 (EXT/D)

병호, 하윤을 쫓아 천천히 뛴다.

하윤이 가까워지자 천천히 걷는 병호.

병호 잠시 멈춰 서서 고민한다.

윗입술을 조금 깨물고선 다시 하윤에게 빠른 걸음으로 접근한다.

병호 저기요!

하윤 어? 무슨 일이세요?

병호 혹시...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하윤 번호요?

병호 네.. 그쪽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아까 저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가 보라고 하셨잖아요. 지금 그러고 싶어 졌어요. 저랑 같이 밥 세 번만 먹어요.

하윤 세 번이요?

병호 네! 세 번 만나고 판단해주세요. 자신 있어요.

하윤 어떤 게 자신 있다는 말이에요?

병호 제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란 거? (멋쩍게 한 번 웃는다.)

하윤 (병호를 잠시 바라보다 미소를 띠며) 알겠어요. 폰 줘보세요.

하윤, 병호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준다.

병호 고마워요. 이따 연락해도 되죠?

하윤 그러세요. 밤늦게만 아니면?

병호 음.. 오늘 저녁엔 약속 있으세요?

하윤 오늘이요?

병호 네, 오늘. 제가 카톡 같은 거 능숙하게 하지 못해서 중간에 실망하고 안 만나주실 거 같아서...

하윤 저 저녁에 약속 없어요. 지금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요.

병호 아 다행이다. 그럼 저녁 같이 드실래요?

하윤 그래요.

병호 아 그런데 어디 가야 하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하윤 그냥 제가 아는 데 가요! 혹시 못 드시는 음식은 있어요?

병호 없어요. 저 뭐든 다 잘 먹어요.

미소를 지어보는 병호.

S#8. 음식점. (INT/E)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스피커.

손님이 반쯤 차있는 음식점.

그 가운데 병호와 하윤이 마주 앉아있다. 병호는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있고 하윤은 메뉴판을 보고 있다.

하윤 이거 어때요? 엄청 맛있는데.

갑자기 병호의 핸드폰이 울린다.

병호 잠시만요...

전화를 받지 않고 머뭇거리는 병호.

하윤 왜 전화 안 받아요?

병호 음... 그게 사실 저 저녁에 친구랑 약속이 있었거든요.

하윤 네? 그럼 빨리 전화받으세요. 친구 분이 많이 기다릴 텐데.

병호 그래도 될까요?

하윤 네! 얼른 받으세요!

병호 핸드폰을 들고 자리를 뜬다.

S#9. 음식점 앞 (EXT/E)

음식점 밖으로 나오며 황급히 전화를 받는 병호.

병호 어.. 왜?

친구(F) 전화받자마자 뜬금없이 왜야. 야 많이 기다렸지? 나 방금 내렸어. 너 몇 번 출구에 있어?

병호 정말 미안한데 오늘 저녁 취소하면 안 될까?

친구(F) 뭐? 너 미쳤냐?

병호 아 정말 미안해. 근데 급한 약속이 생겨서

친구(F) 급한 약속? 뭔 소리야 갑자기. 여자 만나는 거 아니면 어딘지 빨리 말해라.

병호 여자.. 만나고 있는데?

친구(F) 뭐?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병호 진짜야. 나중에 얘기할 테니까 한 번만 봐줘. 미안해. 끊는다.

친구(F) 야! 야!

병호 전화를 끊고 다시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S#10. 음식점 (INT/E)

안으로 들어와 재빨리 자리를 찾는 병호.

병호를 보며 하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병호 (자리에 앉으며) 정말 미안해요.

하윤 저한테 미안해하실 게 아니라 친구 분이 많이 화나셨을 거 같은데.. 괜찮아요?

병호 네 괜찮아요. 그 친구가 불알친구..

하윤 네?

병호 (당황해하며) 아, 죽마고우라 금방 이해해줬어요.

하윤 (웃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약속 있으신데 왜 저한테 밥 먹자고 하신 거예요?

병호 친구보다 그쪽이랑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요. 친구는 앞으로도 볼 시간이 많은데 그쪽은 지금 아니면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호, 괜스레 부끄러워 바로 말을 이어간다.

병호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그쪽, 그쪽 하니까 되게 어색해요.

하윤 이름이요? 하윤이에요. 홍하윤!

병호 (옅은 미소를 띠며) 와.. 이름 예쁘시다.

하윤 이름이 예쁘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병호 어.. 외모가 예쁘다? 사실 이름만 블라인드 테스트하면 이름이 예쁘단 소리 못 할 것 같아요.

기분이 좋아져 웃는 하윤.

병호 저는 박병호라고 해요.

하윤 박병호요? 야구선수 이름 아닌가?

병호 어 맞아요! 야구선수 이름도 아시네요.

하윤 유명한 사람 몇 명만 알아요. 박병호 선수는 멋있어서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병호 네 정말 멋있죠. 전 팬이 된 지 꽤 오래된 것 같아요. 실제로 몇 번 봤는데 덩치가 커서 제가 초라해지는 기분이었어요.

하윤 (살짝 웃으며) 벌써 자신감 잃으신 거예요?

병호 아뇨. 아뇨. 제가 나은 부분도 많다고 생각해요. 머리 좋고, 키도 1cm 정도 더 크고.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 옆을 가리키며) 박병호 선수 키가 이 정도예요. 그래서 제가 내려다봤어요.

하윤 (웃음이 터지며) 1cm 차인데 어떻게 사람을 내려다봐요.

병호 가능해요.

병호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눈을 아래로 살짝 흘긴다.

하윤, 병호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본다.

S#11. 카페 (INT/N)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거닐고 있다.

카페의 창문 너머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병호와 하윤이 보인다.

병호 그런데 하윤 씨는 성격이 정말 밝은 것 같아요. 그게 단순히 ‘저 사람 밝다.’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밝은 기운을 전해주는 느낌? 전 그런 분들이 되게 부러워요. 저는 반대로 그런 소리 자주 듣거든요. 너무 부정적이다, 회의적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저한테 인간적인 매력을 못 느끼는 듯해요. 그게 제 콤플렉스예요.

하윤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구나. 근데 제 성격도 마냥 좋은 성격은 아니에요.

병호 어떤 점에서요?

하윤 밝고 긍정적이라는 얘기 많이 듣다 보니 가끔은 억지로 밝은 척해야 될 때가 있거든요. 저도 힘들고, 불안한데 말이에요. (웃으며) 근데 병호씨 보면 좀 더 밝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에요. 혼자 속앓이 많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병호 맞아요. 힘든 일이나 속상한 일 있어도 혼자 속으로 삼키는 것 같아요. 아무한테도 말 못 하고요.

하윤 그럼 일단, 감정표현부터 솔직하게 해보는 거 어때요? 부모님한테나, 친구들한테나. 고마울 땐 고맙다고, 미안할 땐 미안하다고. 제 생각엔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내려면 다른 사람한테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는 것 같아요.

병호 그런가요?

하윤 네!

병호 (고개를 몇 번 살짝 끄덕이다가 웃으며) 고마워요.

하윤도 병호를 보고 웃는다.

병호 (핸드폰을 보며)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하윤 (고개를 끄덕인다.)

병호 그럼 갈까요?

하윤 네.

병호 하윤 자리에서 일어난다.

S#12. 건국대입구역 근처 골목길 (EXT/N)

병호 하윤 나란히 길을 걷고 있다.

병호 고민에 잠겼다가 걸음을 멈춘다.

병호 저... 하윤 씨?

하윤 네?

병호 저희 내일 또 볼 수 있을까요?

하윤 내일요?

병호 네, 내일요.

하윤 저 내일은 약속 있어요.

병호 아.. 약속 있으세요?

하윤 (살짝 웃으며) 주말은 어때요?

병호 저 주말에 다 돼요.

하윤 오늘처럼 약속 있는데 없다고 하시는 건 아니죠?

병호 (고개를 흔들며) 아니요.

하윤 그럼 토요일에 볼래요?

병호 네, 좋아요. 아..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하윤 네? 저 병호씨가 말 뜸 들일 때마다 무슨 말할까 약간 무서워요.

병호 아, 그게 저희 말 놓는 거 어떤지 물어보려 했어요,

하윤 (긴장한 병호를 보고 웃는다.) 그건 그렇게 뜸 안 들여도 될 거 같은데. 그냥 오빠라고 부르면 되죠?

병호 네. 아... 응.

병호 하윤 서로 바라보며 웃는다.

병호와 하윤 나란히 길을 걸어간다.

병호 토요일엔 내가 데이트 풀코스로 짜 올게. 맛있는 거 먹자.

하윤 오, 그래! 기대 많이 하고 있을게.

병호와 하윤, 가로등이 비치는 곳을 벗어난다. 대화 소리 점점 작아지고 화면이 어두워진다.

S#13. 서울대입구역 근처 골목길 (EXT/N)

화면이 밝아진다.

환하게 보이는 음식점 간판.

음식점 앞에 10명 남짓 사람들이 음식점 입구에 줄지어있다.

병호와 하윤이 음식점 밖으로 나온다.

하윤 오빠, 저녁 잘 먹었어. 짱 맛있었어!

병호 다행이다. 멀리 왔는데 실망할까봐 걱정했는데.

하윤 정말 맛있었어. 태국요리가 생각보다 괜찮네. 친구들이랑 나중에 와봐야겠어.

잠시 동안 길을 같이 걷는다.

하윤 근데 여기를 뭐라 한다고?

병호 샤로수길.

하윤 샤로수길?

병호 응, 샤로수길.

하윤 이름 되게 웃기다.

병호 맞아. 나도 처음에 들었을 때 되게 웃겼어. 이름 누가 지었을까 생각하면서. 너무 독창성 없지 않아?

하윤 그럼 오빠는 뭐라고 이름 지었을 거야?

병호 음...

병호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린다.

하윤, 병호를 유심히 바라본다.

하윤 기대된다.

병호 샤리단길?

하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뭐야~ 그냥 경리단길 아류네.

병호 사실 세상에 새로운 게 어디 있겠어. 생각해보니 샤로수길도 이름 잘 지은 거 같아.

하윤 오빠 엄청 뻔뻔하네.

병호 당당한 거라고 해줘. (하윤을 보고 웃으며) 하윤아, 우리 학교 놀러 갈래?

하윤 그래!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 걸어가도 되나?

병호 웃다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하윤을 바라본다.

병호 걸어가면.. 너 다리 많이 아플 거야. 지치고, 힘들고.

하윤 응? 뭐야?

병호 학교 멀어서 다들 버스 타고 가거든.

하윤 아 그래? 내가 한 번도 안 가봐서. 뭐야, 근데 이제 나 놀릴 줄도 아네.

병호 놀리다니? (고개를 살짝 여러 번 좌우로 흔들며) 아니야. 가자.

병호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S#14. 서울대 문화관 옆 벤치 (EXT/N)

병호와 하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병호 하윤아?

하윤 응?

병호 너 아메리카노 좋아해?

하윤 응! 커피는 아메리카노지! 오빠도 좋아해?

병호 아니.

하윤 응? 근데 왜 아메리카노 시켰어?

병호 그냥 네가 시키니까 시켰지.

하윤 (부끄러워하며) 뭐야~

병호 근데 좋아하진 않아도 카페 가면 자주 시켜. 일단 제일 싸잖아.

하윤 그럼 안 마시고 그냥 모셔둬?

병호 아니, 마시긴 다 마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시원하니까 쭉쭉 마시고 따뜻한 거는 식기를 기다린 다음에 집에 가기 직전에 보약 먹듯이 쭉 들이켜.

하윤 으. 오빠 완전 이상해.

하윤 병호의 어깨를 한 번 툭 친다.

하윤 커피를 한 번 음미하면서 마셔봐.

병호 (병호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몇 초간 머금다가 삼킨다.) 이렇게?

하윤 그래, 그렇게!

병호와 하윤의 맞은편, 어두운 거리.

병호(V.O) 근데 좀 쓰다.

하윤(V.O) 맛있다고 생각하고 먹어야 맛있는 거야.

어둠이 깊어진 밤하늘

병호(V.O) 그래? 맛있다, 맛있다.

하윤(V.O) 그래. 그렇게 연습해.

둘의 대화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S#15. 술집 (INT/N)

술집 종업원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한 테이블에 가져다준다.

병호와 친구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둘 다 조금 취해있는 모습.

병호는 얼굴이 굳어있고 친구는 조금 화나 있다.

친구 미국 간다고 말 안 했다고? 완전 쓰레기네. 뭐 그냥 가기 전에 한 번 해보려는 속셈이야? 먹고 버리려는 거냐?

병호 야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친구 그럼 뭔데?

병호 진짜 잘해보고 싶어. 정말 좋은 사람 같아.

친구 (코웃음 치며) 얼마나 봤다고 벌써 정말 좋은 사람이래.

병호, 친구가 말하는 동안 아래를 보며 눈을 감는다. 다시 말을 시작하는 병호.

병호 지금까지는 여자를 만날 때면 항상 후회가 됐었어. 그 날 집에 들어올 때나 아니면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흘러서든. 그때 내가 말을 재밌게 했더라면, 더 옷을 잘 입었더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면 뭐 이렇게.

친구 근데?

병호 이번엔 후회 같은 게 안 돼. 과거의 나한테 붙잡혀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냥 이 생각만 하게 되더라.

친구 무슨 말인지 알 거 같긴 한데 어떤 여자가 두 달 있으면 미국으로 영영 가는 남자랑 연애하겠냐.

병호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해야 하는 거겠지?

친구 당연하지, 죄책감도 안 들어?

병호 들지 당연히.. 아 근데 말하기가... 그렇네. 진짜 좋은 사람이라서... 잘 사귀어보고 싶은데.

친구 (병호의 말을 끊으며) 됐고, 다음에 만나면 바로 말해. 그냥 다 내려놓고 어디 템플스테이나 가라.

병호 눈을 깜빡이며 테이블을 향해 한숨을 내쉰다.

S#16. 종로 서촌마을 골목길 (EXT/D)

행인이 없는 기다란 골목길.

서로 마주한 병호와 하윤.

병호(N) 말해야 했다. 근데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미소 짓는 하윤.

병호(N) 하윤이의 웃는 얼굴을 보면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윤이가 지금처럼 계속 웃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하윤이 옆에 좀 더 있고 싶었다.

하윤에게 고백하는 병호.

고개를 끄덕이는 하윤.

병호와 하윤, 행복한 표정으로 골목길을 걷기 시작한다.

병호(N) 많은 연인들이 헤어진다. 하지만 그들은 끝을 알고 시작하지 않는다. 100일, 1년, 1000일, 심지어 결혼을 미리 말한다. 더 행복한 내일을 상상하는 건 연애의 커다란 묘미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하윤이도 이걸 알아야 한다. 하윤이가 우리의 미래를 말하기 전에, 더 큰 상처를 받기 전에.

병호 하윤, 골목길 끝에 다다른다.

CUT TO

골목길을 나오는 순간 날이 어두워진다. 의상이 바뀐 병호와 하윤의 옆모습.

시간의 경과, <한 달 후>.

병호와 하윤, 술집 앞에 멈춘다.

병호, 하윤의 손을 잡고 술집으로 들어간다.

S#17. 술집 (INT/N)

주문한 술과 안주가 테이블에 들어온다. 병호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손을 뗀다.

병호 하윤아,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하윤 할 말? 뭔데?

병호 음.. 그게...

하윤 뭔데~

병호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는다.

조금 뜸을 들이다 말을 꺼낸다.

병호 나 8월 말에 미국으로 떠나.

하윤 미국? 여행 가는 거야? 부럽다.

병호 여행이 아니라...

진지한 병호를 보고 약간 긴장하는 하윤. 잠깐의 정적.

하윤 그럼?

병호 나 미국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어. 9월부터 거기서 일해야 돼.

하윤 응? 무슨 소리야?

병호 9월부터 미국에 있는 회사를 다녀야 돼. 가족 다 같이 가. 이민 가는 거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하윤.

병호 한국에는 8월 말까지만 있을 수 있을 거 같아.

당황하는 하윤.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하윤 최근에 정해진 거야?

병호 좀 됐어.. 사실.. 너랑 사귀기 전에 정해졌던 거야...

하윤 뭐라고?

병호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다시 정적이 흐르다가 하윤이 병호를 쏘아보며 말을 시작한다.

하윤 지금까지 나한테 숨긴 거야? 왜?

병호 말할 수가 없었어...

하윤 말할 수가 없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병호 네가 정말 좋아서, 네가 상처받는 게 싫어서. 우리 잘 돼가는 데 그르치고 싶지도 않았고...

하윤 지금은? 내가 좋지 않고, 상처받아도 되고, 잘 돼가는 데 그르쳐도 되고?

병호 그게 아니라..

하윤 진짜 어이없다.

병호 당연히 네가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우리 사이 어떻게 할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윤 (병호의 말을 끊으며)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하는 거야? 왜 지금 말하는데? 좋은 감정 쌓인 걸 무기로 나 가두려고?

병호 절대 아니야. 그냥 난...

하윤 됐어.

하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간다.

병호 체념하며 고개를 푹 떨어뜨린다.

S#18. 경복궁역 승강장 (INT/N)

훌쩍거리며 몸을 조금 들썩이는 하윤의 뒷모습.

지하철이 도착하여 문이 열리지만 뒤돌아선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하윤. 대기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지하철에 탑승한다.

하윤, 의자를 찾아가 그대로 주저앉는다. 핸드폰에 있는 병호와 같이 찍은 사진을 넘겨보다 울음이 터지는 하윤.

텅 빈 승강장에 하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S#19. 술집 (INT/N)

안주는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있고 옆에 소주 세 병이 놓여있다.

병호 무표정하게 큰 잔에 소주를 반쯤 들이붓고 바로 벌컥벌컥 마신다.

이어 핸드폰을 붙잡아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가까이하다가 포기한다.

병호, 다시 잔에 소주를 따라 마신다. 가만히 있는데 눈물이 흐른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둔 채 양손으로 이마를 받치는 병호. 눈물이 테이블에 떨어지자 오른손으로 눈물을 훔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눈물을 닦아 내는 것을 포기한 채 소리 내어 우는 병호.

화면이 어두워진다.

하지만 몇 초간 병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S#20. 술집 (INT/N)

화면이 밝아진다.

테이블 위에 소주 네 병과 계란탕 하나가 놓여있다.

친구가 홀로 앉아있다.

곧이어 병호가 비틀거리며 친구의 맞은편에 앉는다.

친구 야 정신 좀 차려라. 무슨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어.

병호, 그저 웃는다.

친구 너 헤어졌지?

병호 어.

친구 잘했어 인마. 좀 늦긴 했어도 그렇게 하는 게 맞아.

병호 고개를 숙인 채 왼손 검지로 옆머리를 긁적거린다.

잠시 후 친구의 핸드폰이 울린다.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지 않는 친구.

병호 누군데 그렇게 인상을 써?

친구 미안하다. 무음으로 해놔야 되는데 깜빡했네.

병호 뭐야. 누군데?

친구 지윤이.

병호 지윤이? 근데 왜 안 받아. 여자 친구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친구 아 몰라. 잔다고 말했는데 귀찮게 전화 오네.

병호,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다.

병호 뭐냐. 나보고 쓰레기라 하더니.

친구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이쯤 되면 거의 다 이렇게 돼.

병호 뭘 다 그렇게 돼?

친구, 의자에 등을 기대며 우쭐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친구 야, 연애란 말이야 끊임없이 연착륙하는 과정이야. 어떻게 계속 뜨거울 수가 있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올해로 벌써 5년째야. 앞으로도 계속 만나려면 서로 자기 시간 존중해주는 게 필요해.

병호 뭔 소리야. 거짓말하는 게 상대를 존중하는 거냐. 마음도 없는 거 같은데 왜 계속 사귀냐?

친구 어차피 다른 사람 만나도 또 같은 과정 반복할 텐데 쓸 데 없는 데다 에너지 쏟기 싫어. 진짜 뭐 하나 빠짐없이 다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다면 모를까. 근데 그럴 가능성 희박하잖아? 합리적인 거지. 그리고 나 아직 지윤이 사랑해.

병호 합리적? 대단한 경제학도 납셨네.진짜 사랑해? (비웃으며)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봐.

친구, 가슴에 양손을 얹고 잠시 고민한다.

친구 (미소를 지으며) 모르겠네.

병호 지윤이 불쌍하다 진짜. 너도 불쌍하고.

고개를 가로젓는 병호.

S#21. 하윤의 자취방 (INT/E)

하윤과 친구 두 명이 방 안에 앉아 맥주 한 캔씩을 마시고 있다.

친구1 그니까 하윤아, 다 잊어버려. 너는 훨씬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친구2 맞아. 그런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은 상종도 하면 안 돼.

하윤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친구들, 하윤의 눈치를 살핀다.

친구1 아 맞다. (친구2를 보며) 너 어제 헤어졌다며.

친구2 응. 이번엔 한 달도 안 돼서 헤어졌어. 내가 사귀기 전이랑 후가 다르다나 뭐라나. 우리 언니가 나 엄청 놀리더라. 요새 초딩들도 투투는 넘기는데 넌 뭐냐고. 어휴. 나한텐 위로도 해줄 필요 없어.

친구1 그럼 웃어도 돼?

친구2 (정색하며) 아니. 웃지도 마.

친구1, 친구2 같이 웃는다.

하윤도 살짝 미소를 보인다.

친구2 그런데 진짜 좋은 남자 만나기 어려운 것 같아.

친구1 맞아 맞아.

친구2 연애 많이 해봐야 남자 보는 눈이 생긴다는데 난 잘 모르겠어. 그게 연애하면서 좋은 남자의 특성을 발견하고 교집합을 찾아나가는 게 아니라 안 좋은 남자의 합집합을 찾아나간다고나 할까. 어떤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이유만 나열할 수 있는 게 진정으로 사람 보는 눈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

친구1 맞아.. 그러면서 나 자신은 상처투성이가 되어있고.. 난 그래서 그게 걱정돼. 정말 좋은 사람이 진심으로 나한테 잘해주는데 편견에 사로잡혀서 ‘너도 아니야‘라고 밀어낼 수도 있잖아.

친구2 우리 되게 진지한데?

친구1 그러게.

친구1과 친구2, 헤벌쭉 웃는다.

이전보다 큰 미소를 보이는 하윤.

친구1 아무튼 제대로 된 연애 좀 한 번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는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어,

친구2 맞아 맞아. CC를 했어도 진짜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그렇게 만날 붙어 다녔는데도.

하윤, 고민에 잠긴다.

S#22. 병호의 자취방 (INT/N)

옷과 술병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는 병호. 그러다 몸을 몇 번 뒤집는다. 몇 초 후, 핸드폰이 울리자 재빨리 낚아챈다.

병호 어... 하윤아?

하윤(F) 오빠, 잠깐 나올 수 있어? 나 오빠 자취방 앞이야.

병호 어? 진짜? 알았어. 바로 나갈게.

병호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간다.

S#23. 병호의 자취방 건물 (EXT/N)

병호가 4층에서부터 뛰어 내려온다.

빠르게 움직이는 병호의 발. 층마다 센서등이 하나씩 켜진다.

1층의 현관 센서등이 켜지자 하윤이 보인다.

잠시 정지하는 병호. 하윤, 병호를 보자 울기 시작한다.

몸을 들썩이는 탓에 가방 한쪽 끈이 어깨에서 흘러내린다.

병호, 조심스레 하윤에게 다가가 가방끈을 올려준 후 양손을 맞잡는다.

병호 하윤아, 울지 마..

하윤 오빠..

병호 울지 마.. 응? 울지 마, 하윤아..

하윤 오빠 3일 동안 안 봐서 너무 후회됐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하루하루 소중한데.

병호 (울먹이며) 미안해 하윤아. 내가 잘못했어.

하윤, 병호 품에 머리를 파묻는다.

하윤 오빠 생각 다 흘려보내려 했는데 그때마다 금방 다시 채워져. 오빠랑 같이 있던 순간 하나하나가 정말 생생해. 오빠가 무슨 말했는지, 어떤 표정 지었는지 계속 생각 나.

눈물이 고인 하윤의 두 눈.

하윤 오빠니까 그래.. 오빠라서 그래..

병호 하윤을 더 끌어안는다.

한동안 둘의 움직임이 없자 센서등이 꺼진다.

화면이 어두워진다.


S#24. 관악산 입구 산책길 (EXT/D)

화면이 밝아진다.
병호 하윤 손잡고 길을 걷는다.

병호(N)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몰랐을 것이다. 지금 잡은 하윤이 손이 얼마나 따뜻한지.
우리가 마주한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가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CUT TO

하윤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면서 슬쩍 병호를 본다.
병호는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하윤, 오른손에 찬물을 적신 후 병호 뒤에 다가간다.
하윤이 오른 팔로 목을 휘감자 차가움에 깜짝 놀라는 병호.
병호, 씩 웃으며 하윤의 양 볼을 손으로 꼬집는다.

병호(N) 매 초마다 나를 내던졌다.
그러자 평소라면 가볍게 넘겨버렸을 것들이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왔다.

CUT TO

병호 하윤, 물가에 발을 담그고 있다.
둘 옆엔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하윤 와, 진짜 시원하다.
병호 물이 얼음장 같은데.
하윤 오빠 근데. 이건 그냥 혼자 생각해본 건데.
병호 뭐가?
하윤 우리가 좀 더 일찍 아니면 나중에,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더 오래 행복했을까?
병호 나도 그런 생각해 본 적 많아. 근데 짧은 시간이라도 너 만나서 정말 행복해.

병호, 미소를 지은 뒤 말을 이어간다.

병호 하윤아, 죽기 전에 자기 인생이 필름처럼 스쳐간다는 말 들어봤어?
하윤 들어봤지!
병호 나는 너랑 만난 시간이 가장 선명할 거 같아.
필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거 같고. 막 애쓰지 않아도 그럴 거 같아.
하윤 오그라들어! 근데 오빠 좀 멋있는데.

하윤, 고개를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이며 병호를 보고 웃는다.

하윤 우리 나중에 또 우연처럼 만나면 바로 알아봤으면 좋겠다.
병호 그러게. 꼭 그랬으면 좋겠다.
하윤 오빠는 여자 친구 생겨서 나 못 알아보는 거 아니야?
병호 그럴 리가.

병호, 하윤과 눈을 마주치며 더 가까이 다가간다.

병호 (미소를 띠며) 절대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
하윤 어휴. 느끼해.

병호와 하윤, 웃음이 크게 터진다.


S#25. 서울숲 입구 (EXT/E)

횡단보도 너머 병호와 하윤이 보인다.
둘 다 평소보다 옷을 차려입은 상태이다.

병호 (주위를 쭉 살피며) 와 여기 오랜만이다.
하윤 (병호를 째려보며) 전엔 누구랑 왔었을까?
병호 (약간 당황하다 이내 태연한 척을 한다.) 군대 있을 때 부대가 여기랑 가까워서
후임들이랑 같이 왔었어.
하윤 아 그러셔요?
병호 네! 그렇습니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하윤의 손을 잡는다.) 근데 하윤아 길가
위험하니깐 안쪽에서 걸어. (하윤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러자 병호의 등 뒤로 가서 병호를 끌어안는 하윤.

병호 갑자기 왜 그래?
하윤 그렇다고 오빠만 위험하면 안 되지. (웃으며) 같이 위험하자.
병호 (웃으며) 생각은 좋은데 이러고 어떻게 앞으로 가. 앞은 보여?

병호의 등 뒤로 조금 삐져나온 하윤의 치맛자락만 보인다.

하윤 아니! 그럼 나 업어줘.
병호 (웃으며) 그래.

하윤, 병호에게 업히자 바로 오른쪽 볼에 뽀뽀를 한다.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 병호.

하윤 왜 안 가? 나 무거워?
병호 그게 아니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데 나도 오른쪽 뽀뽀만으로는 걸을 수가
없어서.
하윤 뭐야~ (병호의 왼쪽 볼에도 뽀뽀를 한다.)

병호, 웃으며 걸음을 옮긴다.


S#26. 서울숲 사슴 방사장 (EXT/E)

병호 자판기에서 사슴 먹이를 하나 사서 나온다.

CUT TO

사슴 방사장을 앞에 두고 서있는 병호와 하윤.

병호 하윤아, 먹이 사 왔어.
하윤 오 땡큐. 오빠 먼저 먹이 줘 볼래?
병호 아냐 난 괜찮아. 너 먼저 해.
하윤 그래!

하윤 봉지에서 사슴 먹이를 조금 꺼내 방사장 안으로 손바닥을 슬쩍 내민다.
사슴이 다가와 하윤의 손바닥을 핥자 하윤이 인상을 쓴다.

하윤 오빠. 얘가 내 손바닥 핥는데 느낌 완전 이상해.
병호 어떻게 이상한데?
하윤 으 몰라. 말로 표현할 수 없어. 근데 사슴 진짜 귀엽다.
병호 그러게 진짜 귀엽다. 눈망울이 하윤이 닮았어.
하윤 진짜?

하윤 병호에게 갑자기 다가와 눈을 몇 번 깜빡거린다.

병호 응!
하윤 말 예쁘게 했으니까 선물 줄게. (병호에게 손바닥을 들이민다.)

병호가 놀라서 뒷걸음질 치자 재밌어하는 하윤.

하윤 나 손 씻고 올게!

화장실로 향하는 하윤,


S#27. 서울숲 구름다리 (EXT/E)

병호 하윤 손잡고 구름다리를 걸어가고 있다.

하윤 여기 경치 되게 좋다.
병호 그럼 같이 사진 한 번 찍을까?
하윤 그래!

병호 잠시 두리번거리다 지나가는 한 커플을 발견하자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다가간다.

병호 저기 저희 사진 한 번만 찍어주실래요?

행인1(남) 사진이요? 네.

병호, 하윤에게 돌아가 같이 자세를 취한다.

행인1(남) 남자분 조금만 더 활짝 웃어주실래요?
병호 (어색하게 표정을 바꿔가며 미소를 지어보다가) 아 좀 이상한가.
하윤 오빠 나 봐봐.

고개를 돌려 하윤을 보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게 되는 병호.

행인1(남) 지금 딱 좋아요. 찍겠습니다. 하나, 둘. 한 번 더 찍을게요. 하나, 둘.

찰칵하는 카메라 소리.

CUT TO

병호 하윤, 구름다리 끝에 다다르자 한강이 보인다.
하윤이 쪼르르 달려와 병호를 바라보며 앞에 선다.
하윤, 머리를 뒤로 젖히곤 눈을 빠르게 깜박 거리며 병호를 응시한다.

병호 어? 왜 그래?

하윤 대답하지 않고 병호를 계속 바라보다 웃는다.

하윤 내 남친 얼마나 잘생겼나 확인하려고.
병호 응?
하윤 옆모습 보는 시간이 거의 다잖아. 길 걸을 때나 영화 볼 때. 그리고 카페에 있을 때도.
오빠는 옆에 앉는 거 좋아해서 정면을 볼 시간이 별로 없어.
병호 그래?
하윤 응! 그래서 내가 잘생긴 얼굴 보려고 이렇게 앞에 섰지.
근데 역시 조각미남이네.
병호 (수줍게 웃으며) 조각난 미남 아니고?
하윤 아니야. 오빠 안 잘생겼으면 안 만났어!

병호 몸을 낮춰 하윤과 눈높이를 맞춘다.

병호 우리 처음 만난 날 네가 물어봤던 거 기억 나?
하윤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마지막으로 연인이랑 하고 싶은 게 뭐냐는 거?
병호 응! 지금 해도 되지?

하윤 고개를 끄덕인다.
병호 몸을 일으켜 세운 뒤 하윤을 꼭 끌어안는다.

병호 고마워.

화면이 어두워진다.


S#28. 카페 (INT/E)

<5년 후>.
화면이 밝아진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커피 로스팅 기계.
주문대 앞에서 친구와 통화 중인 병호.

알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병호 (핸드폰을 잠시 떼며) 고맙습니다. (귀에 핸드폰을 다시 갖다 대며) 바빠도 친구
결혼하는 건 봐야지. 아무튼 진짜 축하해. 내일 보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병호 커피를 챙겨 밖으로 나간다.


S#29. 광화문역 7번 출구 (EXT/E)

병호, 거리를 걷다가 멈춰 서서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병호가 고개를 조금 숙이는 순간 한 커플이 옆을 스쳐 지나간다.
병호, 이어폰이 바지에서 반 쯤 흘러나온 채 뒤를 돌아본다.
한 남자를 바라보며 얘기하는 하윤의 옆모습이 보인다.
몇 초간 표정 없이 하윤을 바라보는 병호.
병호,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이곤 입 속에 머금는다.
얼마 후 머금은 커피를 삼킨다.
병호, 옅은 미소를 한 번 짓고 몸을 돌려 다시 길을 걸어간다.
바지에서 흘러나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핸드폰에서 음악을 재생한다.
음악 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병호의 어깨너머로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뒤에 병호를 바라보는 하윤이 흐릿하다 점점 선명해진다.

병호를 바라보며 아무 말하지 않는 하윤.
남자가 옆에서 하윤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왼 손목에 찬 시계를 유심히 바라보는 하윤.
고개를 몇 번 끄덕인다.
하윤 뒤돌아서서 남자와 함께 걸어간다.
병호와 하윤, 조금씩 멀어진다.

광화문 방면으로 향하고 있는 병호의 뒷모습.
그림자가 병호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다 멈춘다.
북악산을 분명하게 응시하는 병호.
이어 시선을 조금 더 위로 향한다.
북악산 너머 해가 지고 있다.
붉게 물든 하늘 위에 천천히 쓰이는 타이틀,

사랑할 시간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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