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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대학문학상 영화·문학 평론 가작

기사승인 2017.12.03  05: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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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와 앙장브망
이윤복(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16)

기형도의 시에는 현실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단절감, 좌절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두고 평론가 김현은 ‘기형도의 시가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며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이라고 평하고 있다. 또한 그는 기형도의 시를 평가하는 데 있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괴이한 이미지들 속에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자신 속에서 암종처럼 자라나는 죽음을 바라다보는,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 있음을 이야기한다. 기형도의 시는 1980년대의 억압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한 지식인의 고뇌를 잘 담아내고 있다. 일견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단어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그의 독창적인 시작법(詩作法)은 김현의 평가처럼 전반적인 시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형도가 자신의 시 전반에 걸쳐 이러한 그로테스크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의 영향이 크다. 김현은 기형도 시에 등장하는 낯선 이미지들을 지적하며 물론 이러한 이미지 자체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전부는 아님을 지적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시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낯설음’이 시를 이끌어가며 그가 느끼는 감정들을 표면화하여 전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기형도의 시에 전폭적으로 사용된 이 ‘낯설게하기’가 단순히 이미지 차원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형도의 시에서는 형식 역시도 이런 ‘낯설음’을 주는 요소로 작동한다. 그는 시집 전반에 걸쳐 의도적으로 행을 나눔으로써 일반적인 통사구조를 해체하고, 행간에 휴지(休止)를 삽입함으로써 이질감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시적 의미를 강조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형식적인 특성으로 인해 독자들은 그의 시를 통해 그가 느끼는 소외나 좌절, 절망 등의 감정에 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며 시인이 느꼈던 불화(不和)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낯설음’은 끝끝내 기존의 사회질서와 온전히 융화될 수 없었던 작가의 삶을 투영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문학에서 앙장브망은 단순히 표현기법의 하나로 여겨졌고 김수영과 같이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일부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할 때가 아니면 그리 중요한 것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그에 따라 앙장브망이 과연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시행배치구조를 앙장브망으로 부르는가에 대한 연구도 크게 진행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기형도의 시를 앙장브망의 관점에서 해석한 글 역시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기형도의 시에 있어서는 그 작품세계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단절감, 소외감, 좌절감 등이 앙장브망이라는 기법을 통해 더욱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처녀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에서 총 156회나 앙장브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앙장브망이란 무엇일까?

앙장브망이란

앙장브망(enjambement)은 의도적 행갈이로 번역되는 시적 표현 기법 중 하나로 20세기 초에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된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 остранение)’라는 문학적 개념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러시아 형식주의는 텍스트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여 예술의 목적을 예술을 지각하는 과정 그 자체로 인식하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의도적으로 시행을 바꿈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낯설음을 느끼게 하고 이를 통해 시적 효과를 달성하는 방식이다.

영문학에서는 앙장브망을 시의 시행 구조와 통사 구조의 불일치라고 설명한다.1

“Enjambment is non-alignment of (end of) metrical frame and syntactic period at line-end: the overflow into the following poetic line of a syntactic phrase (with its intonational contour) begun in the preceding line without a major juncture or pause. The opposite of end-stopped.”

그러나 실제로 기형도 시에서 발견되는 앙장브망을 단순히 시행 구조와 통사 구조의 불일치로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또한 한국어에서는 종결어미 나타나지 않은 위치에서 문장이 끝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기 때문에 단순히 통사 구조가 완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작정 앙장브망으로 볼 수도 없다. 한국어에서의 앙장브망에 대한 보다 정밀한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에서는 이미 ‘행’과 ‘연’이라는, 공백과 분리를 통한 형식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모든 행갈이를 앙장브망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앙장브망의 핵심은 바로 ‘의도적’ 행갈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독자들은 시에 나타난 행갈이들을 보며 무엇이 의도된 것이고 무엇이 의도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사실 시의 행 자체가 현실 언어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의도적인 현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단순한 행갈이와 앙장브망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행갈이가 등장한 문장의 통사적 결합을 얼마나 훼손하는지에 달려있다. 조금만 더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 이쯤 되면 끊어도 괜찮아.’하는 지점이 아닌 곳에서 행갈이가 발생하면 낯설음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앙장브망의 시적 효과가 달성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언어학과 시 이론이 만나는 지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앙장브망의 언어학적 이해

언어학에는 ‘휴지(休止, pause)’라는 개념이 있다. 휴지란 언어 요소 사이에 삽입된 공백이다. 휴지는 일차적으로는 화자가 호흡할 시간을 주는 생리적인 기능을 담당하지만, 언어 요소들 사이에 삽입되면 음운 변동의 실현을 막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요리인 ‘국밥’은 [국빱]으로 발음하지만, 이 사이에 혹시라도 휴지가 들어가게 되면 [국#밥]과 같이 뒤에 오는 소리가 된소리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휴지는 인접한 요소들을 단절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휴지는 의미 변화를 이끌기까지 하는데, ‘호랑이가면을좋아한다’라는 문장에 각각 다르게 휴지를 삽입함으로써 이를 확인할 수 있다.2 여기서 기호 #은 휴지를 의미한다.

‘#호랑이가#면을#좋아한다(호랑이가 면이라는 음식류를 좋아한다)’

‘#호랑이#가면을좋아한다#(호랑이가 가면을 좋아한다)’

‘#호랑이가면을#좋아한다#(호랑이 모양의 가면을 좋아한다)’

물론 이러한 휴지는 실제로 실현될 수도 있고, 혹은 이론적으로는 실현될 수 있는 자리이지만 화자의 개별 발화의 습관 때문에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잠재적 휴지’라고 부를 수 있는데3, 앙장브망은 바로 행갈이가 이런 ‘잠재적 휴지’가 아닌 곳에서 나타날 때 주로 발생한다.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 <어느 푸른 저녁> 부분

기형도의 위 시를 보면 ‘정지하다’라는 하나의 동사가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지하다’는 하나의 단어로 이 사이에는 휴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 언어에서는 공백을 사용하지 않는 지점에 공백이 생기면서 거리감이 생성되고 이는 곧 낯설음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앙장브망은 이런 단어 내부 구조를 벗어나 문장 성분들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후략)

- <어느 푸른 저녁> 부분

언어학적으로 ‘걷고 있다’는 보조동사가 본동사와 결합하여 상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걷고’와 ‘있다’는 다른 어떤 문장 성분들보다도 가깝다. 그러나 기형도는 의도적으로 이 두 성분을 단절시키고 있다.

이렇듯 휴지는 음운현상의 실현을 방해하기도 하고 어휘수준과 문장수준에서 의미를 구성하는 데에도 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의 방편으로서의 휴지의 역할은 문학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운율이라는 독특한 요소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운문에 사용될 때 기존의 언어학적 기능에서 출발한 분리감에 대한 문학적 변용이 이루어진다. 휴지를 통해서 각각의 시어들을 분리시키며 이에 따라 시어의 의미를 구성하거나 흐름을 제어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앙장브망은 이러한 분리 혹은 단절을 예상치 못한 곳에 부여함으로써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시 내부에서의 단절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시적 효과에 집중하게끔 만들어준다.

기형도의 시에서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앙장브망이 실현된다. 시를 읽는 독자들은 시의 형식적인 특징을 통해 정서적 환기를 경험하게 되며 이것이 독자들을 기형도의 시세계로 더욱 몰입시키는 하나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때의 앙장브망이란 단순히 언어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언어학과 유리된 존재가 아니라 언어학적으로도 그 실현양상과 원인을 고찰할 수 있는 일종의 언어현상이다. 어학적으로 보았을 때 안정된 것으로 여겨지는 통사구조를 인위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일종의 문학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문학의 형식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 효과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개별 언어의 언어학적인 개념과 완전히 동떨어져서는 해석하기 어려움을 시사하며 산문에 비해 그 형식성이 두드러지는 운문은 특히나 언어학적인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정서를 표현하고 심화하고 전달하는 문학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이제부터는 과연 기형도가 어떻게 자신의 시세계에서 앙장브망을 활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기형도의 시에는 단절감과 소외감이 진하게 묻어있다.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오래된 書籍>) 사람인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오려 시도하지만 세상이라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쓸쓸한 가축들처럼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안개>) 그에게 세상은 차갑고 두려우며 인간의 모든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이다. 그런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길고 좁은 방죽을 지나야만 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빠져나오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끝에 도달한 안개에 덮인 읍내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는 공장의 검은 굴뚝과 겁탈당한 여직공, 얼어 죽은 시체와 쓰레기 더미들뿐이다. 여기서 시인은 한 번의 좌절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공장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그 방죽을 지나 세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들어가기만 하면 두꺼운 안개가 낮게 깔리면서 수많은 더러운 모습들을 가린다. 서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어렵사리 자신만의 세계에서 빠져 나왔건만 자타(自他)의 단절은 여전하다. 모두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부조리도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이 아니다. 결국 시인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왔지만 사회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하지 못함에 좌절을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무너지게 된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그 일이 터졌을 때, 시인은 먼 지방에 있는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었다.(<입 속의 검은 잎>) 그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에서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격리되어 있었고 그 앞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맞게 살아가지 못했다. 물론 이는 단지 시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1980년대에도 억압적인 군사정권 아래에서 흔히 말하는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기에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고,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는 암담한 상황이 발생했다.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는 시구를 통해(<대학 시절>) 당시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회가 잘못 되고 있는 것을 알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용기를 내서 발언한다는 것이 어려웠음을 보인다. 그는 이런 부당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시를 통해 드러낸다.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 <전문가> 부분

기형도는 ‘아름다운 골목’의 사이에 휴지를 삽입함으로써 실제는 그가 이 골목을 전혀 아름답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 <숲으로 된 성벽> 부분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 <안개> 부분

또한 기형도 시에는 삭막한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도 들어있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리낌 없이 다른 것을 해하는 사회와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삭막해지는 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이 앙장브망을 통해 강화된다.

기형도와 앙장브망: 자신에 대한 회의, 내면의 소외

시인은 단순히 사회가 주는 불합리한 압력에 의해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걸어온 길 자체에 대한 회의(懷疑)를 한다. 자신이 잘못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의 일상 속에서, 시인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의 발자취가 너무도 형편없음을 깨닫는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지나쳐왔던 나의 과거와의 첫 번째 조우는 너무도 평온한 어느 한 순간에 불현 듯 시작된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중략)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진눈깨비> 부분

진눈깨비는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로 불합리한 사회에 철저히 발맞춰 사는 것도, 자신의 신념을 철저히 지키는 것도 아닌 애매한 삶을 살아가는 시인과 오버랩된다. 그 순간에 시인은 서류 봉투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다가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고통을 깨닫는 그 순간을 시인은 앙장브망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바로 그 순간성에 주목한 것이다. 이 순간이야 말로 시인이 자신의 삶이 자신이 생각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하게 된 첫 순간이다. 허리를 굽히다 말고 든 그 생각이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분수령이 된 것이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이전의 시인과 이후의 시인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였느냐의 여부가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행말에 휴지를 삽입하여 둘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간극을 표현해내고 있다.

깨달음 이후로 시인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살지는 않고자 한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희망을 찾아본다. 자신의 신념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내 시도는 좌절되고 시인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이고 마치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더 크고, 높은 것”(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낸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 <정거장에서의 충고> 부분

시인은 희망을 노래해보려 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 추억은 이미 황량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잘못된 길을 돌아나가려고 해도 이미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기서 길 잃은 존재가 된다. 추억이 주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 장면에서 시인은 의도적으로 개가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모습을 분리시킨다. 이 시에서 개는 지나온 삶, 추억을 의미한다. 시인의 추억은 처량하고 생명력을 상실한 채 눈만 껌뻑이고 있다. 추억이 군데군데 쓰러져 있다는 것은 되살려낼 만한 추억 자체가 사실 별로 없다는 시인의 암담한 고백이다. 삶의 곳곳에서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었지만 그들은 한데 모여 강력한 힘을 발휘할 원동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시인은 의식적으로 추억을 상기하고 그를 바탕으로 희망을 꿈꿔보려 한다. 그것이 바로 개들이 군데군데 쓰러진 모습과 개로 표상되는 추억 자체를 분리해 배치한 이유이다. 추억의 황량함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최대한 인식하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곧 실패하고 망각을 본다.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추억은 나의 손을 깨무는 고통이 되어 돌아온다.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군데 쓸어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 <가수는 입을 다무네> 부분

그리하여 이제 시인은 고통마저도 자신을 버린, 극심한 소외와 단절, 고독 속에 던져진다. 더 이상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다. 시인은 ‘그’이고 그는 떠돌이이다. 시인의 고민과 갈등은 방향성을 상실한 채 나부끼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고 심지어는 그 고통 끝에 완전한 체념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그’를 고립된 공간에 배치한다. 앞에서는 이미 문장이 끝났다. 자신이 속해야할 문장은 다음 문장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못한다. 떠돌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제 ‘그’를 옮겨 앞문장의 끝에 내려놓고 행말휴지를 삽입하여 고립시킨다. 세상과의 단절이고 가족과의 단절이다. 그리고 통사적으로 문장의 주어를 분리함으로써 그 위치에 꼭 ‘그’가 아니더라도 다른 떠돌이가 자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시인은 점차 괴로운 세상으로부터 멀어진다. 자신을 가두고 자신의 지난날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자신의 삶은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으며(<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황폐한 것이었다.(<질투는 나의 힘>) 그에게 희망은 무의미하므로 희망은 텅 비어 있고 그 어떤 것도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을 바꿀 수 없다. 괴로움과 고통의 먼지가 시인을 뒤덮고 있지만 결코 그것이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나는 원래 그런 존재였다고 시인은 말하게 된다. 희망조차 시인을 바꿀 수 없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부분

이 모든 일들은 일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천히 내부를 잠식하며 진행된다. 처음에 그는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이러한 모습들이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상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내면은 이미 완전히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런 어두운 내면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타인으로부터도 완전히 단절되고 소외된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은 <오래된 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를 /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가수는 입을 다무네>에서는 앙장브망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분신(分身)인 ‘그’를 통사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여기도 저기도 소속될 수 없는 고통을 형상화했다면 <오래된 書籍>에서는 오히려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자신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고통을 표현한다. 고통 받는 자신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행말휴지를 배치하여 주어인 ‘나의 영혼’과 그 상태인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상황에 모두 주목이 가도록 하였다. 좌절에 휩싸였다는 현재의 상태를 기술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상태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상태라는 것 역시 중요하고 역설한다. 앙장브망은 그 사이에 들어가 통사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어느 한 쪽으로 비중이 쏠리는 것을 막고 있다. 의미 무게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시인은 자신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차 결국은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기에 이른다. <빈 집>에 드러난, 사랑을 잃은 시인은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가 스스로를 빈집에 가두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떠나온 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열망, 즉 자신의 삶 속에 존재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자신이 살아내야만 했던 삶의 모습이다. 스스로 유폐되어 세상과 단절되고 자신에게 소외된 시인은 남의 시선 때문에 겉으로는 크게 넓은 이파리를 피워냈던 과거를 떠나 죽음의 이미지를 덧입는다.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중략)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중략)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 <나리 나리 개나리> 부분

이제 시인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크고 넓은 이파리를 피워냈던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했던 생애로 인식한다. 물론 이 시에서 맨 처음에 누이를 부름으로써 이것이 마치 누이에 대한 시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으나 이 시는 시인 본인에 대한 것이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 봄은 더 이상 화자에 대해 묻지 않게 되고 화자는 생명이 제거된 유령처럼 꽃을 꺾음으로써 스스로 봄을 몰아내고 공고한 단절감을 형성하고야 만다.

시인이 이 시집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단절감 및 소외감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어떤 이상향이 있음에도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상황이라는 벽을 만나 거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들이다. 원하던 삶을 살아오지 못한 자신을 반성함에 있어 단순히 성찰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고 이에 불합리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온전히 융화되고 싶지도 않았기에 스스로를 걸어 잠그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있어 단절감과 소외감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감과 소외감은 시 속에서 익명화된 존재, 분열된 자아라는 모습으로 강화된다.

기형도의 앙장브망: 익명화된 존재, 분열된 자아

기형도의 시 중에서는 등장인물들을 익명화된 존재로 그리는 것이 많다. 임세진은 시인이 ‘그’, ‘金’, ‘사내’ 등으로 익명화된 소외의 군상들을 통해 등장인물들을 비인격화된 존재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명칭은 어떠한 인격을 받지 않은 일종의 무의미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4 또한 하이데거와 카프카를 가져와 이런 비인격성에 대해 논한다. 이러한 비인격성은 크게 두 가지 효과를 거두는데 하나는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제거함으로써 어떤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는 소외되고 단절된 개체로서의 인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의 주체성이 상실되면서 고유성이 사라지고 이 인물은 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다시 말해 개성을 상실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보편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 말로 기형도의 시와 앙장브망이 가장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지점이며 시인은 익명성이라는 구조 아래 앙장브망이라는 형식적인 기법을 가미함으로써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단순히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같은 고민을 했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기형도의 시들은 이를 통해 꼭 같은 시대가 아니더라도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현대사회 전반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성기옥은 앞서 말했듯 산문과 운문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행갈이임을 역설하며 행갈이를 통해 구체적인 언어가 특정성을 상실하고 시적 정서를 환기하는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기형도의 시에서 앙장브망이 하고 있는 기능 역시 동일하다.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 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 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튀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즐거운가, 과장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 <오후 4시의 희망> 전문

金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씨이다. 따라서 ‘김’이라고 하는 말은 고유성이 상실된 하나의 인칭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건물에 갇혀서 예정된 무너짐을 기다리고 있는 김은 사실 우리 중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앙장브망은 이러한 익명성을 통한 보편화에 힘을 더한다. 첫 행을 보면 통사적으로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라는 문장이 강제적으로 행갈이 되어 있다. 사실 이미 생각에 대한 내용은 부정대명사를 사용하여 모호함과 부정성(不定性)을 띠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거기에 휴지까지 삽입함으로써 생각의 내용과 생각하는 행동 자체의 거리감을 생성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생각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현 상황에서 중요함을 나타낸다. 김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이는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에 맞서서 ‘나’는 무언가 말하려 애쓴다. 침묵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침묵을 지키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애초에 시적 공간이 죽음과도 같은 딱딱함만이 가득한 곳으로 그려지고 있고, 시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외부와 소통하려는 최후의 시도이다. 그러나 이내 그는 침묵하게 된다. 더 이상의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등장인물들끼리만 소통한다. 일종의 내부적인 소통이고 결국은 이것이 내면으로의 침잠이다.

5행에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역시도 앙장브망을 통해 익명성과 보편성이 부여되는 행위이다. 꽂히게 되는 장소는 등장인물들이 머무는 도시일 것이다. 시적 공간으로서의 도시다. 그러나 이를 인위적으로 행갈이하면서 ‘이곳’은 구체적인 시적 공간으로서 도시의 특징을 모두 상실한다. 휴지가 음운론적으로 음운배열의 연속성을 가로막아 음운현상의 실현을 제약하는 것처럼, 하나였어야 할 통사구조 사이에 삽입된 휴지가 시행의 의미적 연속성을 파괴하고 각자 따로 놀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도시는 단순히 시 내부에 존재하던 가상의 공간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로 확장된다. 시에서 나타나는 좌절감과 단절감, 예정된 모든 무너짐을 기다리고 있는 절망감 등이 시인의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보편성을 획득한, 누구라도 비정한 현실사회에서 겪을 수 있는 감정으로 승화된 것이다. 이렇듯 기형도의 시에서 앙장브망은 강한 결합력을 지니고 있는 구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그 틈을 벌려 문장구조가 가지고 있던 특정성을 해체하고 현대사회 전반에 대한 이야기로 바꾸어버린다. 이를 통해 기형도의 시는 단순히 1980년대라는 한 비극적인 시대를 그린 것이 아닌 소통이 단절된 비인간적인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되는 것이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중략)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 <입 속의 검은 잎> 부분

여기서도 앙장브망을 통해 익명성을 확보하고 있는데, 앙장브망의 다른 효과를 이용하여 그 효과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먼저 시인은 많은 사람이 죽어갔던 어느 한 사건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끔찍한 일이 언제 다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언제고 다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폭력적이고도 불안정한 사회인 것이다. 여기서도 부정칭을 사용하고 있다. 어디인가-어디서-어디든지로 이어지는 3행에 걸친 서술은 유사한 통사구조를 반복하면서 점층적으로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고 위의 시에서 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부정칭으로 지칭한 내용을 심지어 앙장브망으로 기존의 통사구조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시인이 향하고 있는 곳, 또다시 비극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곳, 그를 위해 시인이 가야만 하는 곳이 가지고 있는 특정성을 해체하고 비극이 지금 여기에 다시 재현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문제는 이미 벌어진 그 사건 자체가 아니고 그런 사건이 벌어지도록 만든 사회이며 그 사회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 <가수는 입을 다무네> 부분

그리하여 결국 시인의 개인적인 고통 역시도 특정성이 사라지고 익명성을 획득한다. 시인은 단순히 ‘내가 처했던 상황을 당신들도 언제든 겪을 수 있어요’라는 차원에서 나 자신의 경험마저도 익명화하는,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을 완벽히 그려낸다. 고통을 받는 주체인 사내도, 고통을 주는 존재인 가랑비도 결국 어느 것도 강조되지 못하고 우리는 누가 무엇 때문에 어떤 고통을 받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삶을 살아내게 되는,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에서는 분열된 자아 역시도 그의 단절감을 표현하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사회와 자신을 단절시킨 뒤, 내면으로 침잠하여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행위가 여러 명의 자아가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거나 상황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위에 적은 <오후 4시의 희망>이 있다. 저 시의 등장인물은 총 셋이다. 김과 ‘나’, 그리고 ‘그’. 그러나 이 세 명은 모두 동일인물이다. 블라인드를 내리는 주체가 ‘김’과 ‘나’ 둘로 표현되어 있는 점, ‘나’와 ‘김’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김’과 ‘그’가 바라보고 있다고 표현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시인은 앙장브망을 통해 이들이 사실은 하나의 자아가 분리된 것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의 중얼거림은 사실 다음 행의 내용이지만 굳이 앞에 나와 있는 김의 중얼거림과 병치함으로써 발화자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것은 여러 명의 시적 화자가 사실은 동일 주체에 분리된 것임을 방증하는 시적 장치로 볼 수 있다. 자아 분열을 통한 시의 단절감 형성은 시집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소재이다. 내면으로 파고드는 시인의 치열한 고민의식과 대결의지를 보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장면을 제외하고는 이것이 앙장브망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며

기형도의 시에서 앙장브망이라는 기법이 실제로 문제를 포착하고 시적 정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기형도는 앙장브망을 매우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시인이므로 그의 시에 있어서 앙장브망이 미치는 힘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은 앙장브망이 전달하는 단절감, 분리감 등을 통해 자신이 느꼈던 단절감, 소외감, 좌절 등을 형상화하였다. 나아가 그는 보편적인 정서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감정이나 상황을 포착하는 데에도 앙장브망을 능동적으로 사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내면으로의 침잠이라는 상황은 분열된 자아로, 자신이 겪은 문제가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가 해결되지 않으면 누구라도 언제든 같은 일을 겪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것임을 역설하기 위해서 익명화된 존재를 설정하여 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익명화의 경우에는 앙장브망을 통해 시어가 가진 특정성을 해체함으로써 그 자리에 보편성이 대신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앙장브망을 기형도의 시의 주제의식과 떼어놓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기형도의 시는 도저한 부정적인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김현(1989)에 따르면 그의 시에서는 낙관적인 희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기형도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사용하고, 외부와 단절되어 더 이상 소통할 수 없는 개별자를 그려냄으로써 부정성을 획득한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이 이러한 세계를 구현해내는 데에 오로지 이미지와 시적 주체만이 관여한 것은 아니다. 앙장브망이라는 형식을 사용해서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더욱 극한으로 몰아붙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기형도의 시는 말 그대로 형식과 내용, 시적 심상과 텍스트적 심상의 조화를 통해 드디어 완성되는 일종의 거대한 부정적 서사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1) Alex Preminger and T.V.F. Brogan, co-editors ; Frank J. Warnke, O.B. Hardison, Jr., and Earl Miner, associate editors(1993), The New Princeton encyclopedia of poetry and poetic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359

2) 김성규, 정승철, “소리와 발음”,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2013.에서 가져옴.

3) 김성규, 「잠재적 휴지의 실현」, 『선청어문』 27호,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1999.

4) 임세진, 「기형도 시에 나타난 소외 이미지 연구」, 『겨레어문학』 47호, 겨레어문학회, 2011.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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