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희 기자
취재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거울 없이는 자신의 얼굴도 볼 수 없고, 공기처럼 색깔이 없다면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구조차도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보기 전엔 그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가 그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청소노동자 르포를 준비하기 전, 내게는 청소노동자들의 하루가 그랬다.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일상에 가려져서, 이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을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낙엽은 일종의 낭만이었다. 마지막 잎새가 나무에서 떨어질 때면 소설의 주인공처럼 끝나버린 가을을 아쉬워하곤 했다. 캠퍼스에는 나무가 많았기에 그만큼 낭만도 많았다. 그런데 그 많던 낭만들이 다 지고 떨어지고 난 뒤에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낙엽은 떨어졌지만 쌓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기묘한 캠퍼스를 4년 동안 걸었다. 그렇지만 나무가 많은 학교에 낙엽이 쌓이지 않는 이유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더 사실대로 말하자면 애초에 낙엽이 쌓이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보단 당장 가을이 지난 뒤에 다가올 과제나 시험을 바라봐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 청소노동자의 하루를 체험하고 난 뒤 비로소 그 이유가 보였다. 쌓이지 않는 낙엽, 비어 있는 쓰레기통, 정리된 강의실 책상 등. 너무나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캠퍼스는 사실 누군가가 오롯이 보낸 아침이었다. 해가 뜨기도 전, 혼자 빛을 발하는 가로등 아래에서 청소노동자들은 매일 떨어진 낙엽을 치웠고 주말 동안 쌓인 쓰레기를 버렸다. 그 덕분에 캠퍼스의 낙엽은 떨어지기만 할 뿐, 쌓이지는 않았다.

쌓이지 않는 낙엽처럼, 청소노동자들의 일상도 당연한 것이 아님에도 당연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매년 늘어나는 휴가와 퇴직금이 이들에게는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업체가 바뀌면 다시 1년 차가 돼버린다. 매년 입사 1년 차가 되는 이들이 온종일 허리 펼 새 없이 일하고 받는 돈은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이다.

대형마트 비정규직의 이야기를 다뤘던 웹툰 ‘송곳’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서는 데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같은 캠퍼스 안에 있더라도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각자의 눈에 비치는 학교의 모습은 다르다. 가을을 좋아하는 어느 학생에겐 낭만으로 보이는 낙엽이 청소노동자에게는 노동으로, 누군가에겐 효율적인 고용방식이 다른 누군가에겐 비합리적인 처우로 각기 다르게 보인다. 어쩌면 이런 차이는 우리 눈이 가진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눈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리를 움직여 지금 서 있는 데를 바꾸면 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