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성
의과대학 본과과정

6년이라는 긴 학부생활의 끝에서 마지막 관문인 국가고시를 한창 준비하고 있다. 모의 환자를 면담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실기 시험 속, 수많은 질환들 사이엔 자살자를 위한 상담이 있다. 몇 안 되는 정신과적 응급인 자살. 의학적으로 자살은 불치 병처럼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질환의 한 현상으로 여겨지는 듯 했다.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자살은 조금 달랐다. 시험을 준비하며 기계적으로 던지곤 했던 질문과 위로의 말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반년 전, 외상센터에서 실습할 때의 이야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낙상(落傷)이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때 즈음이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에 조금 초췌해 보이는 인상의 한 남자가 있었다. 교수님은 그를 가리켜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삶’이라고 했다. 그가 자살을 기도한 이유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생존을 원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의식이 없는 남자를 앞에 두고 그의 계부는 호흡기를 떼라 했고, 친모 역시 적극적 치료를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포기한 삶을, 누구도 붙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수님이 ‘이런 경우에 너라면 어쩔 것인가’ 물어보았다. 고민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그저 연명하던 사람이 원하는 죽음을 택하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최선의, 그리고 최후의 선택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의학이 추구하는 도덕관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모순의 굴레에서 쳇바퀴 돌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끝나버리고 마는 고민이었다.

결국 남자는 수술대에 올랐고 그와 그 주변이 방치한 삶으로 다시금 돌아오게 됐다. 인생은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가 아니기에, 남자가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궁금해졌다. 자살의 순간을 후회하고 새로운 삶에 감사하며 살아갈지, 죽지 못한 자신의 삶을 평생 저주하며 살아갈지. 어느 쪽이건 나로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순간들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교재에 쓰여 있는 고작 몇 마디 말로 ‘자살자를 위한 상담’을 어찌 해낼 수 있을까. 그가 겪고 있는 단 하나의 순간조차 짐작하기 힘든 내가, 감히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의학도로서의 나는 자살을 막아야 한다. 자살을 통해 세상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이들의 발목을 다시금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만약 ‘생명’과는 또 다른 가치가 존재한다면, 도대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주어야 하는 것일까. 교과서에도,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그런 막연한 가치를 어떻게 좇을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과연 자살은 치료의 대상일까, 존엄한 죽음을 위한 마지막 선택인 걸까.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치료 가능한 질병들이 많아졌지만, 자살률의 그래프만큼은 무심하게도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린다. 국가고시를 합격해 의사가 된다 한들, 자살자들을 위한 의학적 지지는 과연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만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포옹으로 전달되는 온기가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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