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kr

‘미투’(#MeToo) 운동을 통해 울려 퍼진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그저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불편함과는 다른 의미에서 미투 운동을 둘러싼 불편함들이 있다. 어느새 미투 고백들은 대화의 단골 소재가 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농담조로 “이제 조심해야 한다”고들 한다. 물론, 그런 말들은 농담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조심’의 의미에는 무뎌질 대로 무뎌졌던 인권 감수성에 대한 각성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그런데. 말꼬리를 잡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조심하자는 말일까. 조심하지 않아서 미투 운동이 나오게 된 것일까. 조심해야 성폭력의 가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일까. 성폭력 문제는 개인이 조심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는 표현은 성폭력의 심각성을 희석시켜 단순한 실수로 미화할 수 있다. 절제하고 조심하지 못한 한순간의 실수라는 뉘앙스를 풍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투 고백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결코 한순간의 실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 각 분야에서 권력을 교묘히 이용하여 행해진 권력형 성범죄이자, 조직적인 방관과 사회적 분위기가 더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 ‘조심’이라는 표현이 불편하다. 더구나 구태여 조심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지 않은가.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 그만큼이나 만연하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런 표현에서 대수롭지 않은 일의 꼬투리를 잡는다는 비아냥거림도 읽힌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잘못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은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어느덧 사회적인 공포로까지 자리 잡았다. 최근 들어 성폭력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대안으로 거론되는 ‘펜스룰’(Pence Rule)은 미투 운동을 남녀의 이분법적 문제로 단순화하고, 여성을 사적·공적 영역에서 배제한다는 점에서 시대역행적이다.

미투 고백 기사에는 소위 ‘꽃뱀’이나 무고죄 관련 댓글도 단골로 등장한다. 물론,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종종, 아니 자주 수치스러운 낙인으로 되돌아오곤 했던 한국사회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힘겹게 낸 용기를 손쉽게 ‘꽃뱀’의 ‘무고’로 치부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 <마녀의 법정>에서 ‘무고로 갚는 것이 성폭행 재판의 기본’이라던 조갑수의 대사가 현실에서 반복돼서는 안 될 것이다.

미투 운동을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진영의 구도에서 바라보는 일 또한 불편하다. 성폭력은 어느 진영에서든, 사회의 권력 관계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인권은 진보와 보수의 구별 너머에 존재한다. 미투 운동을 특정 진영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로 바라보는 태도는 조직의 대의를 위해 개개인의 피해는 침묵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 역시 미투 운동이 은폐됐던 성폭력 문제를 가시화하려는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퇴행적이다.

자극적인 보도를 통해 미투 운동을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행태, ‘불륜’이나 ‘연애감정’으로 포장한 변명 등등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본질을 흐리거나, 왜곡하거나, 비꼬는 불편함들 속에서도 미투 운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앞으로도 용기 있는 고백과 고발이 지속될 수 있기를!

유예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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