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1학기 대학신문에선 보다 다양한 삶의 양식을 보여주기 위해 라이프 면을 신설한다. 그 중 ‘칼럼버스’는 학외 필진들이 삶에 대한 단상을 사회와 엮어낸 코너다.

 

성상민
문화평론가

요새는 어떤 모임에 참석해도 비슷한 부류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모임에 참석한 누군가는 최근의 ‘미투(#MeToo) 운동’으로 인해 정체가 밝혀진 유명 인사들의 뒷모습과 추태를 말하며 혀를 찬다. 다른 누군가는 어두운 실체가 드러난 인사들을 성토하고, 어떤 이는 그 당사자에게 호감을 한때나마 가졌던 자신을 질책하기도 한다. (참 다행히도, 내가 참석하는 모임에는 미투 운동이 보수 세력의 음모라거나 억울한 모함이라는 식으로 폄하하는 사람은 없다.) 모임이 끝날 때가 서서히 다가오면 긴 시간 동안 구구절절 나온 수다들은 하나의 고민으로 수렴된다. “혹시나 나도 누군가에게 지적당할 만한 일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이런 고민은 비단 ‘피의자’에게만 해당되진 않는다. 조금이라도 젠더 문제에 고민이 많고, 최근 국내외 각국에서 진행되는 미투 운동에 관심이 많다면 자연스럽게 가질만한 질문이다. 페미니즘 담론이 한국에 들어온 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가정이나 학교, 직장과 같은 일상의 생활공간에서는 가부장적인 질서나 남성 위주의 사고가 최근까지도 당연하다는 듯 통용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평소에 성평등을 말하고, 페미니즘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할지라도 실제 삶에서의 실천으로 쉽게 이어지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결국 모두가 언제든지 남에게 상처 줄 가능성을 만들고 만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 위로는 누나가 두 명 있고, 내 밑으론 형제자매가 아무도 없었다.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자 막내라는 이유로 나에게는 부모님의 온갖 편애와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가족들이 전부 모여 밥을 먹을 때의 일이었다. 식사하다 잠시 목이 메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밥상 위에 물통이 보이지 않아 엄마를 보챘다. 엄마는 작은 누나를 시켜 물통을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작은 누나는 그 요청을 거부했다. “나보다 상민이가 물통이 더 가까운데 상민이 보고 가져오게 해요.” 그러자 바로 찰싹 하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엄마가 작은 누나의 뺨을 순식간에 때린 것이다. “동생이 물 먹고 싶다는데 어디서 대들어!” 그러자 작은 누나는 울면서 일어나 물통을 가져왔지만, 살포시 내려놓지 않고 큰 소리가 나게 내려놨다는 이유로 뺨을 한 대 더 맞아야만 했다.

엄마는 작은 누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누나가 동생을 살갑게 대하지 못한다’는 핑계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부모님은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큰 누나가 작은 누나와 사소한 일로 조금 밥상머리에서 부딪쳐도 크게 싸우지 않는 이상 별다른 말이 없던 분이었다. 당연히 밥상에 물이 떨어져 물통이 필요할 때도 가까운 사람이 가져오면 그만이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이 폭력의 궁극적인 이유가 됐으리라. 하지만 폭력의 피해자인 작은 누나를 비롯해 아무도 겉으로는 지금 이 상황이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빠는 대놓고 엄마를 두둔하며 작은 누나를 지적했고, 나는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내리깔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렇게 그날 나는 비겁한 방관자가 됐다. 직접 누나를 때린 것도, 욕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해야 했다. 어차피 내가 더 물통이 가까운데 내가 가져오면 될 일이었다고, 왜 잘못도 없는 작은 누나의 뺨을 치느냐고.

그 이후에도 이것과 비슷한 일은 집안에서 계속 됐다. 힘을 많이 쓰지 않는 이상, 크고 작은 집안일은 모두 여자들의 것이 됐다. 명절 때 흔히 떠오르는 ‘남자는 거실에서 편안하게 앉아 TV를 보고, 여자는 부엌에서 쪼그려 앉아 전을 부치는’ 풍경도 고스란히 재현됐다. 나는 남자 친척들과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도 가볍게 성적인 농담을 던지고, 학교 성적이나 대학 진학처럼 내키지도 않은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정말 질색이었다. 그러나 거실을 박차고 나와 부엌으로 가서 제사 준비를 도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떤 이야기에도 어떻게든 웃어넘기며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빌었을 뿐, 사소한 저항이나 반항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방관하고만 있었다.

성 평등의 문제는 단순히 직접 성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일상적인 삶의 순간에서, 자주 마주치며 오고 다니는 공간에서 ‘전통’과 ‘관행’이라는 명목 아래 행사되는 일들 역시 누군가에겐 부당한 압박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신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은 단 한 번도 성폭력을 저지른 적이 없다”며 넘어가려 하지만, 지금 자기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긴 매한가지다.

가만히 있는 것이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잠자코 침묵하며 지켜만 보고 있어선 어떤 현실도 바뀌지 않는다. 기존에 형성된 불합리한 사회 구조는 계속 존속하며 크고 작은 폭력과 위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상대적인 우위에 놓였던 자들 대다수는 지금처럼 자신이 놓인 ‘편안함’에 만족하며 살아가리라. 자신들이 정작 그 구조의 수혜자이자, 구조 아래 벌어지는 폭력과 결코 무관치 않은 존재임에도 말이다. 다수의 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가 ‘강력 성범죄’만을 젠더 문제의 전부로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방관자의 자세’는 조금씩 비릿한 내음을 풍기며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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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민 문화평론가는 경희대 자치교지 『고황』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화, 영화, 미디어 그리고 사회에 대한 글을 주로 쓰고 있다. 현재는 「미디액트」 편집위원이자 ‘모두를위한극장 팝업시네마’의 웹진에서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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