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연 문화부장

바야흐로 ‘처음’의 달, 3월이다. 작년 3월에 갓 대학에 입학한 난 처음이 아닌 것조차 처음처럼 느껴질 만큼 너무 많은 처음과 마주했다. 혼자 30분 넘는 거리를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 전공 과제를 하는 것, 밤늦게까지 집 밖에 있는 것같이 사소한 것들조차 처음이었다. 입시 공부에 파묻혀 세상에 눈을 돌릴 여유조차 갖지 못한 채 10여 년을 살아왔던 스무 살에겐 모든 게 어렵고 힘들기만 했다.

그런 내가 수많은 처음들을 겪으며 얻은 교훈은 완벽히보단 무사히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부담의 양은 정해져 있고, 어쩌면 나는 요구받은 일을 완벽하게 할 수 없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완벽하길 요구받거나 스스로 완벽해지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 욕심이 과하면 자신의 능력보다 무리하게 되고 결국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끝을 보기도 전에 포기하게 돼버리곤 한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나는 거기서 종종 도망쳐왔다. 사실 도망치는 것이 나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지치고 괴로우면 그럴 수 있는 법이다. 다만 삶이 계속되는 한 도망치는 것보단 망치는 편이 조금 더 낫다는 믿음이 생겼다. 생(生)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는 다시 삶의 굴레로 돌아와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도망치기 전보다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단지 주어진 일뿐만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책임이란 건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과 다시 한번 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극복하는 일이다. 이 극기의 과정에서 도주하면, 이때부턴 계속해서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절망의 시간이 반복된다. 그리하여 나를 구할 수 있는 최후의 존재인 나 자신조차 무너져 내리고, 우리는 마음 속 작은 방 안에 자신을 꼭꼭 가둬버린다.

그럴 땐 그냥 망쳐버리자. 문제를 내 안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답은 밖에 있다. 혼자서 몇 날 며칠을 끙끙 앓는 것은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 더 잘하는 사람, 더 먼저 인생을 견뎌낸 사람이어도 좋고, 아니면 그냥 내 옆의 누군가여도 무관하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제가 처음이라서 잘 몰라서 그런데, 지금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솔직하게 물어보자. 물론 혹시 나를 얕잡아 볼까 봐, 내가 민폐를 끼치는 것일까 봐, 상대가 대뜸 짜증을 낼까 봐, 걱정돼서 망설일 것을 안다. 하지만 처음이라서 모르는 건 결코 본인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직 모르지 않는가.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고마운 것이고, 짜증을 내면 개의치 않고 돌아서면 된다. 그러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 말고 상대가 딱 나만큼만 좋은 사람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조언을 구하자.

많은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서 “당신은 그게 말처럼 쉽겠지만 난 아니야!”라며 내가 무책임하다고 질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끊임없이 처음으로부터 도망치길 반복해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신문』에 입사하기 전, 나는 무력했고 나를 작은 방에 가둬버렸다. 그곳에 갇힌 나는 앞으로 나갈 걸음을 뗄 수조차 없었다. 문화부장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나 자신에게서 도망치던 나를 붙들고 망쳐가며 도움을 받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나와 함께 기꺼이 이곳에 삶을 할애하고 있는 사람들이 딱 나만큼만 좋은 사람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여전히 한 주 한 주 신문을 발행해 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매일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안다. 반드시 완벽할 필요는 없고, 때때로 답은 내 밖에 있으며, 그래서 처음이라는 것이 어려울지언정 두려워할 것은 아니라는 걸. 그러니 나는 지금 처음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여전히 떨고 있는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망쳐도 괜찮다고, 수많은 처음을 겪고 나면 ‘처음’이 어렵긴 해도 두렵진 않을 순간이 올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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