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 기자
취재부

그대에게 고통받는 친구가 있다면, 그의 고통에 안식처가 돼라. 그러나 딱딱한 침대, 야전 침대와 같은 안식처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가 친구에게 최선으로 쓸모 있을 것이다.

‘때려 부수는 철학자’이자 현대 실존주의 철학을 근간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저작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기로 유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엔 우정을 설명하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니체의 사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대목을 읽고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고통받는 친구에게 푹신한 깃털 침대를 내줘도 모자랄 판에, 딱딱한 야전 침대가 되라니? 분명 일신의 안락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최근 주변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에는 ‘힘내’ ‘파이팅!’ ‘할 수 있어’ 따위가 있다. 보통 운동 경기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구호 같지만, 삶이 운동 경기처럼 까끌까끌할 때는 ‘내가 운동선수인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많이 듣게 될 수도 있다. 학교현장실습을 하는 내내 난 마치 거대한 운동장에 내던져진 몸집 작은 선수처럼 느껴졌다. 원치도 않고, 내 진로와 어떤 상관도 없는 ‘대표 수업자’라는 책임을 맡았을 때는 내가 맡은 일 자체보다 주변의 말들이 나를 더 움츠러들게 했다.

‘힘내’라는 말은 껍데기 같다. 지속적이지도 못하고 그다지 힘이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의미를 굳이 찾자면 ‘네 고군분투를 지켜보고 있고, 고통에 공감한다’ 정도인데, 진실성이 전혀 없다. 이미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 사람에게 힘을 더 내라니. 상황을 공감은커녕 이해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런 사정은 알 턱이 없다.

물론 나도 내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너무 구차하니 그저 억지로 웃으며 ‘고맙다’는 말로 답할 뿐이다. 내 속내를 털어놔도 그들도 각자의 고통이 있으니, 내 ‘징징거림’을 받아줄 여유는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피차가 소모적이고 피곤한 일이다. 그걸 알기에 누군가 짐짓 꽉 쥔 주먹까지 들어 보이며 ‘파이팅’을 외치면 나도 그에 어울리는 껍데기를 들이밀 수밖에.

니체는 진정한 우정을 설명하며 껍데기뿐인 위로를 하는 친구를 경계하라는 뜻을 담았다. 속이 빈 응원이나 위로는 폭신한 침대처럼 달콤할 수는 있어도 그다지 쓸모는 없다. 오히려 의지를 다지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제대로 공감하지도 못하는 공허한 응원 구호는 힘을 죽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폭신해 보이지만 속이 빈 침대가 아니라 딱딱하지만, 속이 꽉 찬 야전 침대다.

반성한다. 사실 나도 취재하면서 수없이 많은 ‘힘내요’를 생각 없이 뱉었다. 수업 준비로 며칠 밤을 내리 새도 아무렇지 않은 채 교단 위에 서야 하는 친구에게, 격무에 시달리느라 화장실에 가는 것도 잰걸음으로 갔다 오시는 선생님께도. 사실 ‘힘내’라는 말은 상대의 힘듦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짓는 최후의 방어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방어탑마저 허물고 함께 고민할 때,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안다. 내가 힘들 때 야전 침대와 같은 친구가 절실한 만큼 나도 친구에게 그런 안식처가 될 수 있기를. 이 고뇌가 끝나면 전보다 강해진 ‘우리’의 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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