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교수

정치외교학부

1970년 관측 이래 단 한 번도 얼음이 붕괴한 적이 없어서 ‘최후의 빙하’라고 불려 온 그린란드 북부 해안의 빙하가 올여름 더위에 녹아내렸다. 일부 기후학자는 2030년 이후에는 북극 얼음이 아예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 모든 것은 결국 다 소멸한다. 북극의 빙하보다 모질지 못한 당신도, 나도, 대학도. 당신이 평생을 갈아 넣은 경력도. 당신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가는 자식들도. 소멸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어떤 존재를 지탱했던 조건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소멸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소멸의 방식. 어떤 소명과도 무관하게, 어떤 심미적 흔적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소멸해 가는 길이 있다. 마치 상한 달걀을 깨뜨렸을 때 비린 냄새를 풍기고 흐물거리며 퍼지는 노른자처럼. 두 번째 소멸의 방식. 스스로 자신의 소명을 설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뒤, 그 소명을 달성함을 통해 존재 이유를 잃고, 스스로 소멸해버리는 방식이 있다. 마치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고 나서 검은 우주 속에서 밝게 소멸해버리는 로켓추진체처럼.

지난 몇 년간 서울대가 보여 준 지리멸렬한 궤적은 첫 번째 소멸의 방식을 닮았다. 서울대 역사상 최초로 총장 공백 상황을 불러온 스펙터클 속에서도, 서울대의 정체성과 관련된 공적인 토론은 부재했다. 사퇴한 후보를 지지했던 이들은 그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기에 끝내 후원했고. 그는 어떤 가치를 배반했기에 자진사퇴 한 것일까. 전임 총장이 주장하듯이 이 사태가 개인의 도덕 문제에 불과한 것이라면, 서울대가 이 초유의 사태로부터 배울 것은 없다.

서울대의 정체성 논의의 부재는 이미 전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이사회는 순위를 뒤바꾸면서까지 그를 총장으로 추천했으나, 그가 왜 선출돼야 하는지를 공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기에, 구성원들은 그 결과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총장선출과 관련한 난맥상의 원인을 법인화에 돌리곤 하지만, 문제는 법인화 자체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서울대 정체성의 합당한 재정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법인이라는 인격체의 뼈대를 이루는 정체성이 불투명할 때, 리더십을 창출해내기도, 정당화하기도 어렵다.

정체성 논의의 공백을 메운 것은 세계 대학 랭킹이나 노벨상 수상과 같은 공허한 수사였다. 실로 서울대와 노벨상과는 인연이 깊다. 한때 유력한 노벨상 수상자로 거론되던 시인을 초빙교수로 임용한 적이 있고, 그는 탑골공원 근처 술집에서 공개적으로 자위를 한 적이 있느냐 여부를 두고 역시 서울대 출신 시인과 현재 소송 중이다(「경향신문」 2018년 8월 23일). 러시아어로 글을 쓰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서울대를 방문했을 때, 당시 총장은 노어노문학과를 나와 로스쿨에 간 자녀 이야기를 했고, 함께 했던 참석자들은 “천박하고 무례한 인사말이었다”라고 탄식한 적이 있다(「한겨레신문」 2017년 5월23일). 과연 그때 서울대는 노벨상에 대해 존중을 표한 것일까, 노벨상을 넘어서는 가치로서 로스쿨을 홍보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와 같은 세속적 가치로부터 초월한 어떤 지점에서 노벨상에 대해 농담을 던진 것일까. 진상이 무엇이든 정체성이 부재한 대상에게 원칙에 입각한 비판을 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연체 동물에게 뼈를 때리는 비판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근년에 이 사회를 뒤흔든 정치적 격동의 촉매가 된 한 여자대학의 총장은, 여성 교육이 충분히 실현된 나머지 더 이상 여자대학이 필요 없게 되는 세상을 염원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재직하는 대학의 정체성을 자기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역설적인 학교라고 정의한 바 있다. 격동기의 서울대도 자신의 소명을 보다 정교하게 정의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뒤, 그 소명을 달성함을 통해 결국 소멸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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