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

교육학과 석사과정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다.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나는 연습을 정말 지겨워했다. 학원 발표회 준비가 한창이던 때 어머니와 나는 피아노 연습을 두고 씨름을 벌였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중 어머니께서 이럴 거면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라는 강수를 두셨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이 기억난다. “안 돼. 피아노를 그만두면 애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사라져. 피아노를 못 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애가 돼.” 그때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지금도 잘은 모르겠다. 다만 학교 음악 시간에 피아노를 치는 나를 좋아하거나 부러워했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기억이긴 하지만, 무언가를 못 했을 때 자신이 가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걱정은 지금의 내게도 혹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 유효한 것이리라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멍청한 나’, 혹은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나’가 그것이었다. 나의 가치를 결정짓는다고 여기는 것들에서 나는 무능하지 않기를 바랐고, 이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한없는 자괴감에 괴로워했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대체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도록 만드는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언제나 도움만 됐던 것은 아니다. ‘이것을 못했을 때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 돼버린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일을 그르친 적도 많았다. ‘똑똑한 사람이 아닌 나는 싫다’라는 생각은 자신 없는 과목을 지레 포기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결과로 이어졌다. 주변으로부터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은 조그만 갈등에도 관계에 선을 긋고 ‘이 사람과의 관계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내리는 평가를 심리학에서는 자아존중감(self-esteem)으로 개념화한다. 자아존중감에 대한 많은 연구는 높은 자아존중감을 갖는 것이 적응적이라는 결과를 보고한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아존중감을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결과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신문 기사들은 ‘자아존중감 향상’, ‘자아존중감 UP’과 같은 표현을 제목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높은 자아존중감이 이로운 것이라는 말을 접하다 보면, 그 말들이 ‘높은 자아존중감이 좋다’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가 높은 자아존중감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으로 읽힐 때가 있다. 물론 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내 경험을 돌아봤을 때, 내가 유능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줬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자아존중감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제니퍼 크로커는 ‘자아존중감 추구의 대가’(cost of seeking self-esteem)라는 표현을 통해 높은 자아존중감을 가지고자 하는 동기가 가진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의 연구들은 무언가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생각이 강할수록 당장의 가치감을 위해 진정 이로운 것을 희생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내가 똑똑함으로부터 내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더 큰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데 민감하지 않았다면 더 현명하게 관계를 꾸려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실패한 나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 될 자신도 없다. 다만 내 쓸모에 대한 염려를 덜어내고 내가 딱 그만큼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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