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kr

지난 여름 청와대 홈페이지에 “제 친구가 공정한 심사를 받아 난민으로 인정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스스로를 중학생이라 밝힌 글쓴이는 천주교로 개종한 이슬람국가 국적의 친구가 난민 지위를 인정받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글쓴이와 그의 친구들은 그 이후 청와대와 출입국·외국인청 앞에서 집회도 열었다. 지난 10월 19일, 다행히 해당 학생의 난민 지위가 인정됐고, 소속학교의 학생회는 ‘이름은 잊혀지고 사건은 기억되어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당신이 태아고 어머니의 국적을 모른다고 해도 난민을 반대하겠냐는, 롤즈의 ‘무지의 베일’을 연상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입장문엔 친구의 편안한 일상에 대한 소망, 아직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걱정, 연대한 이들에 대한 감사가 두루 담겨있다. 느슨한 구성의 짧은 글이지만, 문장과 표현 하나하나가 신중하고 섬세하게 배열돼 있었다. 이 글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아주 천천히, 여러 번 읽었다.

“친구와 그를 돕는 우리 학생들”은 이제 잊히길 원한다고 밝혔다.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편안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땅히 누리는 일상도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거대한 행복이 아니라 빼앗긴 평범한 일상이다. 해당 학생과 그의 친구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민들의 관심을 호소해야 했다. 하지만 이젠 우리가 그들을 잊어야 그들은 비로소 일상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역설은 일상 바깥으로 내몰린 이들이 처한 위치를 선명히 드러낸다.

입장문의 당부대로,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여전히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다. 다행히 그의 난민 지위는 인정됐지만, 10월 17일 발표된 제주 예멘 난민들에 대한 심사 결과는 달랐다. 339명은 취업허가 외엔 모든 사회적 권리에서 배제되는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1년간 국내에 체류할 수 있지만, 그 후에는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안정한 처지다. 34명은 인도적 체류도 허가되지 않았으며, 잠재적 강제송환대상이다. 난민으로 인정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출입국청이 “난민 감별사”가 아닌 “난민 인권의 파수꾼”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는 입장문의 당부는 그래서 날카롭게 다가온다.

한 가지 더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해당 학생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이다. 입장문이 더 품위 있게 읽히는 것은 우정과 연대의 경험에서 직접 길어 올린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난민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는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있다. 법무부는 제주 예멘 난민 심사 결과를 발표하며 난민 중에 테러·마약 연루자는 없었다고 밝혔다. 많은 시민단체가 지적하듯 난민심사는 이미 ‘지나치게’ 엄격한 데 반해, 난민 수용에 대한 공포는 과장되어 있다. 이 공포를 걷어내야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난민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 학생들처럼,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보여 준 용기에 대한 감탄과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고 결심하는 행위, 성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연대 그 자체를 통해 희망을 공유하려는 마음, 먼저 등불을 치켜든 이들에게 이끌려 나도 다른 이에게 등불을 나눠 주는 과정이 연대입니다.” 얼마 전 읽은 책 『인권교육 새로고침』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제 난민인권센터에 소액이나마 정기후원을 신청했다. 나는 이름을 잊고,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그들이 보여준 포용을 나누기 위해, 나도 따라 써 본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친구가 의지하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신중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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