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빈
편집장

어릴 때 거실에 앉아 부모님과 TV 뉴스를 자주 보곤 했다. 그때 나는 ‘기자’라는 직업을 싫어했다. 뭐가 문제인지는 콕콕 집으면서 정작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일언반구도 없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십수 년이 흐르고 나는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사건에서 한 발짝 떨어져 무엇이 문제인지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비출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신문』에선 기사가 ‘바란다’ ‘바라본다’ ‘전망한다’ ‘기대한다’ 같이 미래를 내다보는 듯한 단어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종의 공식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정형화된 마무리 방식은 리뷰 회의만 하면 어김없이 지적을 받아왔다. 진부하고 불필요한 마무리라는 것이 쓴소리의 골자였다. 나 또한 그런 지적에 동감했기 때문에 단순히 문제를 드러내는 선에서 기사를 마무리하게끔 손을 본 적도 많았다. 누구나 문제라고 느낄 사안이라면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때 기자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생각게 했던 이유가 시간이 흘러 내가 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가 됐다니, 돌아보니 엄청난 모순이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기자들에게 이 기사가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를 모르겠다며 마무리 부분을 다시 써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명확한 기준을 세우기 전이건만 왠지 모를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스스로 위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런 갈등을 거쳐 기사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대한 한 가지 철칙을 세웠다.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선 그에 따른 해결책이 주어져야 한다. 고발성 기사는 내지르고 끝나선 안 된다. 더 좋은 방향을 고민한 흔적이 배어 있지 않으면 기사로서의 가치도 떨어진다. 이를 위해선 기사를 쓰는 기자 본인이 기사의 방향성과 목적을 이해하고 설정하는 과정이 우선 필요하다. 하나의 완결된 글을 써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기사의 말미를 두고 고민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갈등이 반복되고 계속해서 길을 잃은 것은 자신이 이 기사를 왜 쓰는지, 기대효과는 무엇인지 이해하기보단 어떤 정해진 틀에 맞춰 기사를 꾸역꾸역 써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글은 기사는 아니지만, 기사를 쓸 때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보여주려 한 것이므로 『대학신문』이 나아갈 길에 대해 몇 글자 더 적어보려 한다. 최근 미국 언론에선 해결방법까지 함께 제시하는 ‘솔루션 저널리즘’이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문제만 제기하는 골치 아픈 기사는 읽기도 싫지만, 대안을 제시한 기사엔 좀 눈길이 간다. 2014년 미국의 비영리 단체 ‘솔루션저널리즘네트워크’와 미국 텍사스대 연구팀은 성인독자 750명을 대상으로 동일한 주제되 기존 방식으로 쓴 기사와 솔루션 저널리즘 방식으로 쓴 기사 중 어느 쪽에 호감이 더 가는지를 실험했다. 기사 자체는 물론이고 기사가 수록된 매체에 대한 호감도나 공유 의사 등이 모두 솔루션 저널리즘 기사가 앞선다는 결과가 나왔다. 해결책까지 제시하며 한 편의 완결된 기사를 만들어내자 독자가 돌아왔단 말이다.

학생 기자들이 짬을 내 완성한 기사가 항상 올바른 해결책을 담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이 기사에 담겨 있다면 사람들은 이 기사를 허투루 지나치진 않는다. 고발과 무관한 인터뷰나 학술대회 기사까지 기계적으로 해결방법을 보여주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기사가 이런 과정을 필요로 하는지 구성원들이 잘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대학신문』이 문제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말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사를 지향하길 바란다. 그게 바로 ‘팔리는’ 기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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